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는 사람 Jan 27. 2020

파편과 함께 살아간다-벌새

죽은 편지(dead letter)


수신 불능의 편지

ㅡ“소포는 도착했는데 소포를 보낸 사람은 이제 없어”


'작심 3일'의 끝판왕이 있었다. 첫 출근 3일간은 시키지도 않은 야근과 숙직으로 주위를 부담스럽게 했다. 3일 뒤 그는 돌연 이유 없는 묵언 시위로 버티다 해고 수감돼 감옥에서 고독사 한다. 이 기괴하고 우울한 노동자 얘기는 하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다. 바틀비는 필경사 일을 하기 전, 사서(死書) 우편물 전담 직원이었다.

‘죽은 편지(dead letter)’ 전달자. 편지 주인들이 망자가 돼서 반송조차 안 되는 편지들을 소각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도착할 곳 없는 ‘수신불능’의 편지처럼 바틀비도 돌아갈 곳 없는 신세로 죽었다.


영화 <벌새>를 보며 <필경사 바틀비>가 생각났다. 영화의 여러 얘기 중 하나가 ‘수신 불능’이었고 그 소재로 ‘편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중학생 은희는 우정과 사랑, 가족 그 모든 대상에서 방치되거나 뒤통수 맞는다. 어느 곳 하나 맘 붙일 곳 없던 은희는 한문 학원 선생 영지를 만나 위안을 얻는다. 처음으로 제 말을 온전히 들어주고 마음을 들여다보던 친구 같은 스승 영지가 갑자기 한마디 말도 없이 학원을 그만둔다. 상처 받은 은희에게 어느 날 편지와 스케치북이 담긴 영지의 선물이 배달된다. 답장을 들고 택배 박스에 적힌 주소를 들고 찾아간 집에 영지는 없다.

딸을 찾아온 제자를 망연히 바라보며 영지 어머님은 말한다.

“소포는 어제 왔는데 우리 영지는 이제 없어.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냐? 어떻게 그 큰 다리가 무너지냐?

은희의 편지는 영지에게 도착하지 못했고 은희가 가져간 감사의 떡은 애도의 제사떡이 돼버렸다.


편지의 가장 큰 기능과 역할은 ‘고백’과 ‘도착’이다.

<벌새>는 네게 도착하지 않은 말, 내게 도착하지 않은 마음, 도착하지 않은 버스, 도착하지 않은 사람, 도착하지 못한 편지 등 제때 도착하지 못 한 온갖 ‘수신 불능’을 말한다. 


 내 선물은, 마치 내 편지처럼, 네게 너무 쉽게 전달되거나 영영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선물로서 떠오를 때에만, 그 선물은 자신을 잊은 채 고스란히 네게 전달된다.
<보행. 김영민. 철학과 현실사>

엉뚱한 선물이 배송되거나 소중한 선물이 반송되는 게 세속이듯이, 혹은 그 모든 선물은 결코 진료받는 사람을 찾지 못하거나 아무나 그 선물의 수신자를 자처하는 구조가 세속이듯이, 그렇게, 그의 의도는 세속의 간극에 막혀 외출하지 못한다.
<봄날은 간다- 농담 김영민. 글항아리>



떠난 버스는 오지 않는다

ㅡ“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고백이 제때 도착하지 않는 수신 불능의 어긋남은 언제, 어떻게 발생하는가?  내게 필요한 것이 내가 필요한 순간에 없는 것, 너의 필요한 때와 나의 필요한 때가 다를 때 어긋남은 발생한다. 시간(떠나간 버스), 공간(무너진 건물), 이별과 죽음(부재와 상실), 관계(마음)…… 거의 모든 것에서 발생한다. 이 어긋남으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은희를 좋아하는 후배가 있다.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며 은희의 주변을 서성거린다. 선물 공세를 하고 단짝과 남자 친구에 열중하는 은희에 대한 질투를 숨기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섭섭해한다. 그랬던 후배는 정작 은희가 관심을 보이자 반응이 시들하고 피하기까지 한다.

너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근데 왜 이래?라는 은희의 말에 후배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떠난 버스는 오지 않는다. 후회가 아무리 빨라도 항상 늦듯이. 정류장이 늘 그 자리에 있는 게 뭔 소용이람. 내가 탈 버스, 만날 사람이 떠났는데. 때론 떠난 버스가 내게 전화위복, 행운이 되기도 한다. 그 떠난 버스가 5분 뒤, 혹은 50분 뒤 물속으로 빠지는 어이없는 일도 생기니까. 버스와 나의 어긋남이 행운이 된 경우다.

“버스를 늦게 타서 살았어.”

스승 영지는 그 버스 속에서 죽었지만, 농땡이 언니는 버스를 늦게 타서 살았다. 같은 시공간에서 삶은 이리저리 어긋난다.


<벌새>는 어긋난 이별과 죽음 속에서  상처를 전시하는 대신 응시한다.  상처는 없어지는 게 아니고 비켜설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시간이 지났다고, 치웠다고 다 사라져 없어지는 게 아니라 가구 밑의 유리 조각으로, 무너진 다리 밑의 부서진 버스 파편으로  존재한다. 혹을 떼낸 자리에도 상처는 오래 남는다. 떼낸 혹과 부서진 파편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다. 불쑥불쑥 나타나서 나를 찌르지만 상처 속에서  성장하기도 한다. 상실과 부재 뒤, 오래전부터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상대를 비로소 깨닫는다. 마주 본다.

  

진실은 어긋남의 사실을 사후적으로 깨단하는 그 부재의 힘 속에서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어긋나지 않을 때에는 아예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것.
<봄날은 간다-편지. 글항아리. 김영민>



읽고 있는 책이 바로 당신이다

ㅡ“얼굴을 아는 사람은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



감독은 영화의 주제, 메시지뿐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스타일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긴 복도와 닫힌 을 반복적으로 잡아 거기서 한참 머무는 카메라, 재개발 지역의 철거 반대를 시끄러운 시위가 아닌 적막한 현수막으로 보여주는 것, 뒷모습과 손으로 표현되는 것들.

영화 사이사이의 공간과 소품은 단지 그 시대의 충실한 구현물이 아니라 감독 김보라의 세계관을 엿보게 한다. 학교, 가정, 사회의 여러 문제를 보여주지만 직접적 비판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런 거리감 속의 풍부함은 꼼꼼하고 세심한 공간과 소품 설정의 몫이 큰데 나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책이 눈에 더 들어왔다.


당신의 책장에 꽂힌 책이 당신 과거의 일부고 머리맡에 있는 책이 지금 당신의 관심사다. 마찬가지로 영화나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읽는 책이 곧 그(녀)이다. 또 감독이나 작가의 녹음기, 마이크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에선 책 얘기가 아주 자주 나온다. 두 주인공의 지적 수준을 서로 읽는 책으로 대비시키기도 하고, 인물의 처지와 심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또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읽는다. 탈옥 얘기를 만든 감독이 주인공에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게 할 리는 없다. 홍상수도 영화에서 책을 자주 등장시키는데 최근엔 세간의 비난에 대한 인정과 항변을 책으로 대변하는 도구로도 쓴.


<벌새> 속에서도 주, 조연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도구로 책이 자주 나온다.

인정 욕구와 애정 갈구로 이리저리 방황하는 은희는 <적과 흑>을 영지에게 선물하고 영지의 책꽂이에선 <크눌프 그 삶의 세 이야기>를 뺀다. 감독 김보라는 약간 비밀스럽고 쓸쓸하며 정착하지 않고 잠깐 머무르다 간 자유인 영지를 크눌프처럼 그리고 싶었던 걸까. 그런 영지가 읽는 책은 다양하다. 페미니즘, 노동, 통일, 경제, 철학 등으로 다채롭지만 한 가지 주제로 통일된다.

모든 억압과 차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경청하되 쉽게 판단하지 않는 영지는 감독이 만든 이상적 스승, 어른이다.

은희의 담임은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란 구호를 합창, 제창하게 하고 학력 콤플렉스가 있는 부모는 “여대생 돼야지”라고 한다. 제도권 안의 구역에서 어떤 스승도 만나지 못했던 은희는 ‘방과 후’의 ‘사설 학원’에서 잠깐 만난 영지로 인해 배우고 성장한다. 그것도 영어와 제2 외국어 사이에서 소외된 ‘한문’을 통해서. 은희가 사라지고 무너지는 부재, '망하는 징조' 속에서 성장한다는 이 영화의 정서, 서사와 연결된다.


내 지갑 속 명함과 전화기 속의 인명부를 자랑하던 사람들은 영화 속 영지의 말에 뜨끔하리라.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機人).

얼굴을 아는 사람은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


손가락

ㅡ“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처와 애정 결핍으로 자존감 낮은 은희에게 영지는 말한다.

“자기가 좋아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아.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해. 아, 이런 마음이구나.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그리고 ‘손가락’을 보라고 한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들여다봐.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심신이 너무 지쳤을 때 가장 흔히 하는 말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라는 말이다. 영화에선 '손(가락)'이 직간접적으로 여러 번 나온다. 삶의 희망과 고통을 손가락으로 말한다.

1994년이 배경인 이 영화에는 그때의 인기곡들이 여러 곡 나온다. 귀에 익은 말랑한 추억의 가요 속에서 군계일학인, 80년대 민중가요 한 곡이 귀에 확 꼽힌다.

 '김호철'의 노동가요 <잘린 손>이다. 가사에서 연상되는 투쟁적 장면은 안 나오지만 배역의 캐릭터와 등장인물 간의 합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장면 중 하나였다.


울면 다 용서되나

ㅡ“어디 아빠 보는 앞에서!”


여기서도 남자(오빠, 아빠)들은 여자들의 희생과 인내로 살아간다. 아버지는 밖에선 바람피우고 집에선 폭언 폭행을 일삼는다. 삼촌은 공부 잘하던 여학생이던 엄마의 중졸 희생으로 공부를 더 했다. 각 집의 오빠들은 스트레스를 여동생에 대한 폭력으로 푼다. 대원외고와 서울대 갈 오빠를 위해 온 집안 식구가 참고 희생해야 된다며 폭력도 묵인하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오빠를 혼내는 장면이 나온다.

“어디 아빠 보는 앞에서 동생을 때려!”


동생, 약한 여자를 때린 게 잘못이 아니고 ‘아빠 보는 앞에서’ 때린 것이 잘못이란다. 이랬던 아버지와 오빠가 갑자기 통곡한다. 딸이 귓속 혹을 뗀다고, 누나가 무너진 다리에서 살아왔다고. 이 영화에서 가장 뜬금없는 장면이었다. 울면 다 해결되는 건가. 우는 거 한 번으로 용서되고 풀리는 게 가족이래도 '가족의 이름으로!'떫은 화해다.

은희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일상화를 눈물로 미봉시키고 화해시켜버린다. 신파와 내내 거리 두던 영화는 저 뜨악한 눈물이 옥에 티였다. 그에 비하면 엄마는 얼마나 담담하고 건조한 지!


사회적 비판 의식, 시대적 무거움 속에서도 개인을 경시하지 않는 감독의 다양한 관심과 애정이 영화 곳곳에 드러나지만 비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건 학교 정도다. 좌우 이념, 세대, 성별 간 논쟁이 첨예하게 갈등하는 한국에서 양쪽이 대동단결해서 비판(비난) 할 수 있는 게 교육 이리라. 특정 논란 없이 누구나 거부감 없이 볼 수 있고 어떤 주제로도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이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고 아쉬운 점이기도 했다. 평단과 관객 양쪽의 호감도가 비슷하게 반응하게 하는 감독의 영리함, 혹은 포용적 시선이다.


이전 06화 <기생충>과 <죄와 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