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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Jan 23. 2019

가난 증명서가 우리를 죽였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ㅡ우리를 위한 복지는 없다

가난 증명 대신 죽음을 택한 한국 노인

ㅡ국밥이나 한 그룻 하시죠


'말'은 대화, 감정 교류의 일차적 기능 외에 그 시대만의 새로운 사회 현상을 담기도 한다. 오렌지족처럼 시대의 한 특성을 대변하고 없어지거나 바뀌는 말도 있고 아빠 찬스나 고독사(독거사)처럼 앞으로 계속 쓰일 단어도 있다. 고독사, 독거사(앞으로 표기는 고독사로 통일함)는  IMF 전후 일본에서 생긴 말로 이젠 우리 국어사전 일부에도 등재돼 있고 뉴스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고독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장례 사업과 고독사에 대한 출판물이 증가하는 등 일상 속에 자리 잡게 됐다.

벌써 몇 년 전 기사인 아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미래 지속형 일지도 모른다.

시사인의 김은지 기자가  2014년 11월 14일에 쓴 '외롭고 쓸쓸한 마지막 편지'를 임의로 재구성한 것이며 사진도 같은 기사의 발췌다.


2014년 10월 29일, 서울 동대문구 어느 다세대 주택에서 68세의 노인 시신이 발견됐고 사인은 자살이었다. 자살한 노인의 방에 걸린 달력에는 '28일 이사, 29일 가스'라는 메모가 표시돼 있었다. 노인은 이사하기 하루 전날 목숨을 끊은 것이다. 시신 수습과 유품 정리 중 봉투 몇 개가 발견됐다. 봉투는 눈에 잘 띄는 장소 몇 군데에 나눠 있었다. 현관 출입문 앞에는 마지막 공과금이 된 전기 고지서와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 큰방 침대 밑에는 100만 원가량을 담은 봉투, 작은방 테이블 위에는 1만 원 열 장이 들어 있는 흰 봉투가 있었다. 자신의 시신 수습자가 될 사람에게 남긴 수고비인 1만 원 권 열 장이 든 봉투 겉면에는 ‘고맙습니다.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시죠. 개의치 마시고’라는 메모를 남겼다. 노인의 마지막 유서이기도 한 이 메모와 함께 ‘수분지족, 언행일치, 마음공부 닦자’는 메모도 있었다.

남의 돈과 생명쯤 우습게 취급하며 부끄러움도 모르고 지리멸렬하게 사는 놈들 천지인 세상에서, 부끄럽게 연명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던 노인은 죽음 뒤에도 '누군가의 빚이나 폐가 되기 싫다'는 것을 그렇게 증명했다.


시신 수습비와 공과금 계산으로 추정되는 달력 숫자 표시. <시사인>


죽은 노인은 2000년부터 월 48만 원 정도의 정부 보조금을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있었고, 살던 집의 6000만 원 전세금 중 5700만 원이 한국 주택공사의 대출금으로 고인의 돈은 300만 원이 전부였다.

거주 3년째 되던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집주인은 '집이 팔렸다'며 10월 말에 이사를 해야 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평소 자존심이 강해 남에게 신세 지고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꺼리던 노인은 '단 돈 300만 원이 전 재산이다'라는 자신의 '가난 증명'을 다시 하는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 ‘수분지족, 언행일치, 마음공부'라는 일상의 자기 수양을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증명했다.


오래 혼자 살던 노인의 시신이 단 하루 만에 발견된 것은 남은 사람들 각자의 이해관계 덕분이었다. 대출금 상환을 받아야 되는 주택공사, 이사를 시켜야 되는 집주인과 부동산 업자는 각각의 목적으로 노인에게 연락을 했지만 닿지 않았다. 연락 두절로 인한 경찰 신고로 숨진 그를 일찍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은 노인이 나랏빚이라도 없었다면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날 지경까지 오래도록 방치됐을지도 모른다. 이 노인의 죽음엔 내용이 빠진 형식, 마음을 돌보지 않은 복지, 가난 증명, 1인(독거) 가구, 고독사(독거사), 독거 가구의 사후 시신 수습 같은 이 시대의 많은 문제가 혼재돼 있다.



가난 증명하다 죽은 영국 노

ㅡ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다


'노인 공경,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한국 노인의 우울한 자살사를 들었으니 답례로 여기 영국 노인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죽음에 관한 얘기도 들려 드리지.

한국 노인은 '가난 증명'의 수모에 대한 저항, 혹은 패배감으로 자살을 선택했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건강 증명'을 하다가 죽었다네. 두 나라 노인의 죽음은 자살과 지병으로 인한 심장 발작사로 사인은 달라도 그 배경은 제도에 의한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어. 우리의 죽음은 더 좋은 복지 제도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빠진 제도', '제도 위에 있는 형식' 때문이라고 세상에 알려 주게. 좋은 복지제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있는 제도마저도 쉽게 잘 이용하지 못하게 한 불통 시스템, 형식주의의 행정, 복지 주체의  주객 전도가 우리를 죽게 만든 것이야.


그나마 나, 다니엘은 가난하지만 따뜻한 이웃들과 작은 연대와 위로를 주고받았으니 저 동방의 노인처럼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지는 않았지. 나도 당신 나라의 노인처럼 강한 자존심 때문에 삶이 더 곤궁하고 피곤했지만, 어려운 주위를 돌보고 살필 줄 알며 잘못에는 저항하는 강직한 노인이었다네. 내 생전에 불통의 복지부 직원들과 싸우면서  마음의 큰 상처를 얻고 내뱉은 말이 있어.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이웃을 도왔습니다. 자선에 기대지 않았습니다.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원합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기계적 매뉴얼 안에서 사람은 없고 서류나 기계와만 대화하는 성실한 공무원들의 대답은 항상 같았지.

너희는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릴까요?'대신 다음과 같은 말만 되풀이했지.


난독증 안내 서비스를 이용하세요.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당신의 행동은 방침에 어긋납니다.  하지 마세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제 내가 나랏돈 받기 직전에 어쩌다 재수 없게 화장실 바닥에서 죽어버렸는지를 얘기해주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40년 경력의 인정받는 목수지만 늙고 병들어 이제 노동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고장 난 기계 신세가 됐지. 나라엔 좋은 복지제도가 있고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세금 낸 당신 그만 쉬어라'는 위로나 보답으로 생각하고 질병수당을 신청했지.

좋은 법이 있으면 뭐 하나? 그 좋은 법은 인터넷과 자동응답기를 잘 다루는 자에게만 유용했지. 나 같은 평생 연필 세대에겐 사다리 놓고 A도 모르는, 줘도 못 먹는 떡인 걸. 자동 응답은 '잘못 눌렀으니 처음부터 다시 하세요'라는 말만 반복하고, 인터넷 신청이라는 건 물어 물어 겨우 몇 문장 읽다 보면 끊겨. 그마저도 업무 마감 시간엔 아예 화면 정지돼 버리더군. 한국의 어느 노인은 집주인이 세 올리고 전세 기한 끝날 때마다 가난 증명서를 내야 되는 수모를 못 견뎌 자살했다던데 나는 디지털 복지 시스템 때문에 심장이 뒤집어져 죽었다네.


나는 일을 더 하고 싶어도 의사는 죽고 싶으면 일을 하라 하고, 질병 수당 부처 직원은 내 건강을 국가에 증명하라니 사면초가였지. 내 심장은 나와 의사가 가장 잘 아는데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행정 직원은 손을 머리 위로 들어라 내려라며 몇 마디 묻더니 '아직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상태'라고 판결하더군.

환자임을 증명하려다 오히려 숨 넘어갈 것 같아 질병 수당은 포기하고 직업 수당 받으러 갔다네.



이놈의 심장은 무리하면 죽는다며 뻑하면 협박질인데 언제 죽을지는  말을 안 해 준다네. 여생의 대책은  직업 수당밖에 없어. 그런데 니미 지랄 이번엔 또 '구직 활동'을 증명해야 된다는군. 늙고 병들었다고 아무도 안 써 줘서 일을 못 하는데 무슨 구직 활동? 병든 심장을 부여잡고 보이지도 않는 눈과 힘 빠진 손으로 꾹꾹 눌러쓴 이력서 품에 넣고 아들, 손주 같은 놈들에게 굽실굽실해 가며 받아 온 면접 증명서 내놨더니 '인터넷 이력서'만 증명 효력이 있다는 것이야. 나는 평생 연필만 사용해서 인터넷은 볼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늙은이야!  영감님 사정은 모르겠고 이번엔 '인터넷 교육'을 받으라는군. 목마른 놈이 샘 판다고 공무원 들이받고 싶은 화 , 열 딱지 삼키고 수업 들어갔지만 강사가 하는 말들은 외국어나 마찬가지야. 무식한 내게 화가 나 박차고 나왔더니 교육 미수, 거부자라며 다른 뭣을 다시 인터넷으로 신청하든지 다음 신청 기간까지 기약 없이 기다리래.


계속 이리저리 뺑뺑이만 돌리는 공무원들에게 분통 터져서 고성방가 항의하는데,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여자가 그것들에게 울면서 뭔가 사정하는 게야.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센터 사무실을 못 찾아 조금 늦었지만 오늘 접수 안 되면 우리 애들 굶어야 되니 제발 한 번만 봐 달라고. 업무 시간 아직 남았는데 지들 퇴근 준비한다고 접수 불가래. 오지랖 넓은 나는 내 발 앞의 불도 못 끄는 주제에 다른 복지 신청 대기자의 양해까지 얻어 싱글맘 가족의 신청을 접수시키려 했지. 탁상공론 공무원들은 '원칙에 어긋난다'며 나에게 오히려 페널티를 날리겠다고 협박하더군.

더 이상 참기 힘든 나는 복지부 건물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다.'라는 크라피티 예술 활동하다가 '공무 집행 방해'와 '공공 기물 파손'죄로 경찰서 신세까지 지게 된 거지.



날 더 무능하게 만드는 시스템과 공무원들의 떠넘기기 버릇으로 심신이 지친 나는 모든 복지제도를 포기, 거부하고 내 손으로 만든 집안의 가구들을 하나씩 팔아 연명했어.

공무원들과 부자 국가는 내게 엄격하고 냉혹했으나 가난한 내 이웃들은 따뜻하고 배려심 많았지. 힘들고 지친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준 것은 나라나 제도가 아니라 나처럼 힘없고 가난하고 못 배운 내 이웃들이었어.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많았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던 그 이주 싱글맘 케이티가 특히 여러 가지로 아주 많은 도움을 줬지. 그들의 따뜻하고 배려 깊은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그 어려운 신문물 전자 접수를 했고 이번엔 좋은 변호사와 복지사를 만나게 돼서 긍정적인 재심을 기다리는 중이야. 케이티는 이번에 재심 통과가 돼서 좋은 결과가 나올 게 거의 확실하다며 나를 안심시켜 주는데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더군.


나는 가장 중요한 면담을 앞두고 청원서만은 평소대로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썼지. 마치 종이는 심사하는 당신이고 연필로 쓴 글자는 내 마음이라도 된 것처럼.

마지막 심판을 앞두고 있으니 긴장된 탓인지 오줌이 마려워 면담 전에 화장실에 갔다네. 심장병 환자들은 '늘 조심-'을 화장실에서도 잊으면 안 돼. 그간 이 놈의 수당 좀 받아먹으려고 심신을 너무 혹사한 탓인지 머리는 뱅뱅, 맥이 탁 풀리더니 중심을 못 잡고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지.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지?

없는 놈은 살 만하면 죽는다ㅡ


얼마 뒤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내 친구들을 보았다네.

이게 복지 수당 재심의 긍정적 결과를 앞두고 재수 없게 뒈져버린 내 이야기야. 그런데 내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나는 질병수당이나 직업수당을 온전히, 무사히 받을 수 있었을까?


아래는,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시죠?'의 원 기사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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