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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Jan 11. 2019

소공녀(Microhabitat)

소유하는 삶 말고 존재하는 삶


소유하는 삶 말고 존재하는 삶으로 살기


나는 어릴 때부터 착한 동화가 영 시시했다. 역경 극복기는 그저 성공 교훈 같고 권선징악은 거짓말 같았다. 그러니 공주 판타지 <소공녀>보다는 노상에서 성냥 팔던 소녀가 추위로 동사하는 잔혹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내 취향이었다. 소공녀엔 신파, 통속, 현실과 다른 권선징악 등 내가 싫어하는 요소들이 골고루 들어있다. 둘 다 ‘부모 잃은’ 아이들이 ‘내 집’ 없이 방황하는 이야기인데, 그 호칭과 끝은 다르다. ‘공주’로 불린 아이는 큰 저택을 다시 찾았으나 ‘소녀’로 불린 아이는 성냥불이 꺼지자 에서 얼어 죽었다.  소녀에게 오리털 침낭 있는 작은 텐트 하나라도 있었다면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고 보면 두 소녀의 이야기는 ‘집’에 관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집’에 관해서라면 나 또한 할 말이 좀 있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이사를 했다. 덕분에 내가 14살에 만난 죽마고우 둘은 20년 가까이 세제와 휴지를 들고 한 해가 멀다하고 이사 간 새 집 따라다니기 바빴다. 이사 횟수는 ‘하이타이’가 ‘슈퍼타이’로 바뀌고 드럼 전용 세제가 나올 때쯤에서야 멈췄다. 나보다 이사를 더 많이 한 사람은 못 봤다 싶어도 몇 번인지 그 수를 세어 보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입사 서류로 등본이 아닌 '초본'을 뗄 일이 있었다. 등본상 주소는 현주소와 직전 주소만 올라오지만, 초본은 살아온 세월 동안의 모든 이사 회수가 다 올라온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깜짝 놀랐다. 초본의 장수는 한두 장에서 그치는 게 아니고, 서너 장은 족히 넘었던 같다. 그제야 이사한 횟수를 알게 됐는데 좀 오래된 그때 기억으로도 삼십몇 번은 넘었던 것 같다. 당시 내 나이와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 내가 사는 곳의  행정구역은 총 8개인데, 7개 구를 떠돌아 다녔다. 가지 않은 한 구는 예나 지금이나 집값이 가장 비싸 셋방 살이 전전자가 갈 만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는 일 년에 두 번 이사한 적도 있었다. 집과 이사에 관한 과거의 기억들이 프린트된 주소 위로 따끔거리며 지나갔다. 오십을 넘긴 지금의 내 주소지는 광역시의 7개 행정구역을 다 찍은 뒤 경상북도다.

  

집 없던 먼 나라 소녀들의 동화는 먼 훗날 한국에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집을 가지게 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와 방 한 칸 없는 <소공녀>로.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갖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했던 성실한 앨리스는 결국 집 때문에 죽을(일) 상황을 맞았고, 애써 성실하지 않았던 미소는 죽지 않을 정도의 작은 텐트 하나 건지고 길에서 살아간다. 두 영화에서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빚쟁이고 감옥이다.


(앨리스) “제가 아무리 꾸준히 일해도, 집값은 더 꾸준히 오르더라고요. 그러다 9년째 되던 해에 은행에서 돈을 빌렸어요.”
(미소 후배) “여긴 못 벗어나. 집이 아니고 감옥이야, 감옥! 여기 한 달 이자가 얼만 줄 알아?. 원금 합쳐서 100이야. 월급이 190. 근데 그걸 얼마나 내야 되는 줄 알아. 20년. 매달 100만 원씩 20년. 20년 동안 여기에서 못 나가.”
(미소) “내 인생의 목표가 빚 없이 사는 거야”


영화 <소공녀>는 주인공 미소가 ‘빚 없이 살기 위해’ 하룻밤 몸 붙일 곳을 찾아 유랑하면서 만나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다. 동화 속 <소공녀>는 금수저 세라가 조실부모로 갖은 아동학대를 받다가 좋은 인연 덕에 집과 부를 되찾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흙수저로 변변한 조력자, 제대로 된 방 한 칸도 없이 영화 시작할 때보다 더 가난하게 끝난다. 그런 면에서 영화 제목이 <소공녀>인 것은 반어다. 결국, 이 영화의 화두나 주인공 미소의 삶은 동화 속 판타지라는 자인 속에, 이런 판타지(같은 삶)도 어딘가에는 있을 거고, 그런 삶이 그 자체로 인정받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열망으로 읽혔다.


영화는 각박한 현실을 끊임없이 복기하고 호출하면서 그 현실의 대척점에 미소를 내세운다. 꿈꾸기 힘든 사회, 꿈꾸는 게 무책임함과 죄가 되는 사회, 취업난과 주택난, 결혼과 직장, 안정되고 성공한 삶의 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미소의 삶만은 아주 비현실적이다. 마술이나 공상 과학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만 비현실적인 게 아니다. 보통 사람들에겐 힘든 선택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비현실적이다. 상상의 비현실이 아니라 초현실의 비현실이다.  


영화를 다 본 뒤에 발견한 포스트 속 <소공녀>의 영어 제목은 Little Princess가 아니고 Microhabitat였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미생물을 지칭하는 미소(微小)의 서식 환경지, 그러니 주인공 이름인 ‘미소’도 smile의 그 미소(微笑)가 아닌, 미생물의 최소 생활단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미소(微笑, smile)는커녕 썩소가 나올 주인공 환경과 상반된 이름 미소가 제목 ‘소공녀’의 반어나 판타지의 연장이라면 미소(微小, Microhabitat)라는 영어 제목은 이 영화의 얘기에 훨씬 가깝다. 미생물은 우리 몸에 유익한 세균도 있고 유해한 세균도 있는데 어떤 요소를 만나 어디에 어떻게 서식하느냐에 따라 유해 균도 되고 무해 균도 되는 양면성이 있다. 미소의 유해 균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곳’이다. 집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대상이면 집을 버리거나 떠나거나 안 가지는 것이 미소 서식의 방식이다. 새해가 되자 미소의 유일한 취미이자 사치인 담배와 위스키 값이 옥탑방 월세와 함께 오른다. 가계부 앞에서 그 셋 사이를 오가던 그녀는 과감히 집(방)을 포기한다. 요샛말로 하면 소확행을 위해서 필수품을 포기하는 철없는 짓이고, 조금 철학적으로 포장하면 소유하는 삶 대신 존재하는 삶을 ‘선택’ 한 것이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선택’ 한 것이라는 게 감독의 변(辯)으로 들린다.

주인공은 집보다 담배를 더 사랑하는데,  2015년 새해에 그녀가 피우던 담배가 2,500원에서 4,000원으로 고공 인상된다

번듯한 직장, 내 명의의 집, 결혼 등등 한국 사회의 ‘필수품’이 미소에게도 필수품은 아니다. 남의 필수품이 나의 필수품은 아니라는 태도는 소유를 위해서 내 존재와 자유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녀 삶의 의지, 방식이다. 그 존재와 자유는 ‘취향’과 연결되는데 이 영화와 미소를 지지한 많은 관객 중 영화관 밖을 나와서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과 존재 방식을 위해 미소처럼 살 이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보면 이 따뜻한 영화가 씁쓸해진다. 가난한 여성이 우연한 기회에 재벌 2세를 만나 갖은 고초와 역경 뒤에 신분 상승하는 캔디, 신데렐라류의 드라마가 갖지 ‘못 할’ 환상에 대한 대리만족이라면, 젊고 아름다운 미혼 여성이 자발적 비정규 가사도우미를 하며, 담배와 위스키를 위해 한강 텐트 노숙을 선택하는 엔딩에 대한 지지는 가지 ‘않은’ 환상에 관한 대리만족 아닐까. 그런 대리 만족의 감동은 두 시간 남짓한 극장 안에서 정점을 찍다가 막 내린 영화관 좌석이나 영화관 밖의 밤 네온 불빛에 금방 식어버리기 쉬워 허망하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만나는 사람 중 특별히 악한 사람은 없지만, 외면적으로 안정되고 인정받는 삶에 속한 사람들일수록 타인의 삶에 대한 간섭과 훈계, 조소는 비례하고 노골적이다.  

“너 나랑 결혼하자. 안정감 있고 집 생기지, 가족 생기지. 다 준비돼 있구만”
"그 사랑 참 염치없다. 넌 가족이 없고 혼자만 살아 봐서 모르겠지.”


반면 미소는 그 누구를 만나도, 만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자기와 아주 다른 인생관이라도 판단하거나 충고하지 않는다. 말이 필요한 사람에겐 귀를 열어주고, 휴식이 필요한 사람에겐 대신 일을 해 주고, 온기가 필요한 사람에겐 밥을 해 줄 뿐 나와 다른 삶에 대해 아는 체도, 훈계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에 무례하게 끼어들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오늘 밤은 어디서 잘까를 전전긍긍 가난한 미소가, 만나는 사람 모두와 그녀가 머문 장소 곳곳을 오히려 온기로 물들이는 일들은 내가 도저히 흉내도 못 낼 일이지만 타인의 삶에 대한, 타인의 취향에 대한 그녀의 존중은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집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면서 나만의 '스타일'과 '타인의 취향'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나와 다른 너의 스타일,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말씀!


담배 한 모금, 위스키 한 잔과 맞바꾼 방 한 칸을 잃고 고만고만한 사정의 옛 친구들 집에서 동가식서가숙 전전하던 미소가 마지막에 들린 곳은 성공한 결혼으로 가사도우미까지 둔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전업주부 선배네다. 기식하는 곳이지만 처음으로 전망 좋은 창과, 사적 공간이 보장된 안락한 침실까지 얻었다. 덕분에 굳은 집세로 돈도 차곡차곡 모여서, 피를 뽑아 영화표를 얻던 가난한 연인과, 꿈에 그리던 맛집 탐방에 나설 만큼 좋은 상태인데 뭔가 자꾸 찜찜하다.

“그런데 기분이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해.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 같아.”

미소의 예감대로 그 문제는 곧 발생하고, ‘기분이 안 좋던’ 그 집을 마지막으로 유랑 기식을 마치고 마련한 노상 숙소인 텐트를 멀리서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미생물을 지칭하는 미소(微小)의 뜻처럼, 주인공 미소는 누구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소유의 삶이 아니라 내 마음을 따라 ‘존재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 존재의 최소 생활단위로 택한 마지막 서식지가 빽빽한 고층 아파트 숲이 바라보이는 넓은 한강 변에 놓인 텐트다. 어두운 밤 속의 노란 텐트 빛은 달팽이 같았다. 등에 집을 업고 바다로 모래 섞인 땅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목민 달팽이.

영화는 꿈과 취향을 가지는 게 ‘염치없는 짓’이라는 각박한 현실을 보여주면서 ‘꿈꾸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도 묻는다. 꿈이 없고 꿈꾸지 않는 사람은 과연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냐? 꿈이란 무엇이며 그건 누가 정하는 것이냐? 나(미소)는 희생규모, 담보가 크지만 불확실한 미래적 행복인 집, 직장, 결혼 대신 작지만 확실한 지금 이 순간의 작은 행복인 담배 한 모금, 위스키 한 잔, 가난한 연애를 택한다.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나 자존감은 땅바닥을 치는 현대인들이 모두와 똑같아지면서 어울리지 못하는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삶을 산다면, 자존감 높은 미소의 삶은 조화롭되 똑같지 않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삶이다. 영화에서 동이불화가 내 집을 가진 말뚝 같은 삶이라면 화이부동은 떠도는 유목의 삶이다.


내 존재는 나 자체가 아니라 내가 가진 소유물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집, 직장, 결혼 등 다수 대중이 가진 걸 나도 가졌냐, 못 가졌냐, 얼마나 더 가졌느냐로 내가 존재하는 세상이다. 소유와 존재는 동일 개념이 됐다. 내가 가족과 친구들의 타박과 한심한 눈빛에도 자가용을 갖지 않는 것, 새 가전제품을 사면서도 아이폰, 양문형 냉장고, 드럼 세탁기를 굳이 외면하는 것, 그 흔한 18K 목걸이 반지 하나 갖고 싶지 않은 것은  소유가 아닌  존재하고 싶은 삶의 한 방식이다.

비현실적 미소의 삶은 소유와 존재가 조화롭게 상생하긴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인데, 넘치는 소유가 자유를 구속하듯 극단적 빈곤 또한 자유를 억압한다는 면에서 영화의 메시지는 존재와 자유에 대한 이상, 혹은 환상이다. 집도 절도 없는 가난한 가사도우미 주인공이 패션모델 같은 비주얼로 극 중 누구보다 스타일리시한 것, 현실과 상반되는 아름다운 영상은 다분히 감독의 의도로 보이는데 이 영화가 젊은 세대의 '선택적 취향'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현실이 아닌 동화, 환상이라는 감상에 한몫 더한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너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집을 포기하는 영화 속 미소의 삶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과 별개로 미소 나이에 그 나이 숫자보다 더 많은 이사를 하고 산 나는 ‘집 없는 자유’에 대해 마냥 쉽게 치하할 수만은 없다. 나도 생애 첫 주택을 마렸했을 때 미소처럼 ‘빚지고 구속받는 삶’이 싫어서 집 사는 것을 많이 반대했었다. 그 돈과 노력으로 차라리 하고 싶은 걸 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게 오히려 행복한 거 아닌가 하는 반문도 했다. 그러나 내 나이 곱의 세월을 남의 집 설움을 겪은 어머니를 대하며 더는 ‘마음 편하게’ 살고 싶은 내 마음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한 해 한 해 더 늙고 아픈 데가 많아지는 엄니를 보며 또 1년, 혹은 2년마다 이사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을 대하며 집을 산 건 잘했구나, 내 집이 있는 건 이래서 좋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자유로운 무주택자의 삶이란 가족, 가정이 없는 미소 같은 혈혈단신이나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쓴 1년 뒤, 취향이 아닌 난파선 되기 전의 생존을 위해 미리, 다시 무주택자가 되었다. 무주택자로 오래 산 경험치가 있어서인지 집 없어진 자의 상실감 같은 건 별로 없다.


문득 궁금하다. 이 영화에 열광한 관객 중 ‘한 번도’ 자기 집이 없었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학 입학, 취업, 결혼 등의 분가로 갑자기 내 소유의 집이 없는 게 아니라 태어나서부터 그 영화를 보는 순간까지 ‘자주 이사 안 해도 되는’ 안정된 집이 없던 사람들 말이다. 어떤 문화에 열광하고 지지하는 모습 속엔 현재의 내 모습이나 삶이 투영되기도 하지만, 결코 그렇게 살지 못(안) 할 사람들의 낭만적 시선이나 대리만족과 변명일 수도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미소 삶의 방식을 살고 있는가? 살려는 사람인가? 영화관에서는 열렬히 박수치고 막이 내리면 더 많이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어쩌다 한 번씩 저쪽 삶을 염원하지는 않는가?


팍팍한 삶을 사는 이들이 더 따뜻하고, 차별받는 사람이 차별하지 않는다, 소유와 위선은 비례한다는 인물 설정은 다소 도식적이었지만, 감독의 따뜻한 인간관으로 읽혔다. 출연료 A급 스타 배우들은 없었지만, 배우들 저마다 연기 내공이 느껴지는 기본기가 좋고 배우 간 연기 합도 좋았다. 배역에 대한 이해가 높고 단역이라도 캐릭터가 살아있는 건 각 배역에 대한 감독의 애정, 좋은 시나리오와 연출 덕이리라.  

영화 끝나고 감독을 검색해 보니 나이가 영화 속 인물들과 얼추 비슷하다. '내가 아는 세대, 내가 아는 세계,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장점과 한계가 동시에 느껴진 영화였다.  


같이 보면 좋을 영화로 <성실한 나라의 엘리스>와 <걷기왕>을 권한다. <소공녀>가 집에 대한 착하고 아름다운 환상극이라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집에 관한 암울한 컬트 잔혹극이다. <걷기왕>은 모두가 '달릴 때' 나는 '걷는다'라는 느린 삶의 선택과 '꿈꾸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삶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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