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깔창생리대’ 뉴스는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저소득 가정의 자녀가 아버지에게 생리대 사 달라는 말을 못 해 신발 깔창을 생리대로 쓴다는 기사였다. 휴지나 수건을 생리대 대용으로 쓰며 생리 기간엔 학교 결석을 자주 하던 학생이 가정 방문을 한 담임선생으로 인해 그 사정이 전해지기도 했다. 영화 <가버나움> 속에는 몇 년 전 한국의 깔창생리대 뉴스보다 더 기막힌 장면이 나온다.
12살 소년 자인은 폐가 같은 건물의 한 칸에서 도대체 형제가 몇 명인지도 불분명한 집의 소년가장이다. 누울 자리도 변변치 않은 집에 식구만 넘쳐, 신발을 발치에 두고 찬 바닥에 누워 붙어 자는데 자다가 뒤척이면 서로 얼굴이 맞닿는다. 집이라기보다는 외양간에 가깝다.
부모는 얇은 커튼 하나 너머로 어린 자녀들이 굴비처럼 누운 바로 옆에서 섹스하고, 자인은 그 소리를 무심히 대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만성화돼 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아침 자인은 더러운 요에 묻은 혈흔을 발견한다. 한 방안 부모의 섹스와 자택 출산을 많이 대해서인지 초경의 의미를 자연스레 터득한다. 이제 여동생 사하르가 임신할 수 있으며, 누구네 집 딸처럼 곧 늙은 남자에게 팔려 갈 수도 있다는 불길함이다. 자인은 동생 손목을 잡아끌고 더러운 공중 화장실로 간다. 피 묻은 여동생 팬티와 바지를 서툰 손으로 빨아주고 입었던 자신의 티셔츠를 벗어 생리대로 건네며 말한다.
“늙은 놈한테 팔려가 몸종 노릇 하다 죽기 싫거든 생리 사실을 들키면 안 돼.”
불길함은 현실이 되고 자인은 여동생 사하르와의 동반 가출을 계획하고 슈퍼에서 생리대를 훔친다. 영화 대부분이 실화에 근거한 <가버나움>엔 ‘생리대도 살 수 없는’ 절대적 빈곤과 함께 ‘생리하는 순간 매매혼’의 물건으로 전락하는 레바논의 강제 조혼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주축은 가난, 아동학대, 인신매매, 조혼과 매매혼, 불법 체류자와 난민이다.
영화 속 삶은 처절하고 비극적이지만 마냥 우울하고 냉소적이지만은 않다.영화 속엔극단적인 악인도 선인도 없다. 누구나 이런 면에선 죄를 저지르지만 저런 면에선 한 줌의 연민을 일으킨다. 특정 인물을 쉽게 악인화시켜 가해자를 빨리 단죄하는 대신 레바논의 현실을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중립적이지만 책임질 사람은 불분명한 양비론으로 보이기도 한다.
홈드라마적 구성으로 개인이 아닌 시민, 가족 구성원이 아닌 사회와 국가, 세계의 공동체적 고민과 책임을 묻는다. 이런 감독의 세계관과 핸드헬드 촬영, 비전문 배우 캐스팅, 글이 아닌 말로 전달하는 대본, 촬영 중 현장 요소에 따른 콘티 변경 등의 다큐멘터리적 작법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보는 우리 쪽을 비평하는’ 영화관과도 일면 통한다.
“영화는 사람을 판가름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며 감독은 신도 재판관도 아닙니다. 악인을 등장시키면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워질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관객들은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써 일상으로까지 끌어들여 돌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영화를 본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갈 때, 그 사람의 일상을 보는 방식이 변하거나 일상을 비평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를 언제나 바랍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자서전』
실지로 감독인 나딘 라바키 자신도 영화를 찍으며 많이 변했고, 영화 속 배우들을 돕기 위한 ‘가버나움’ 재단을 창설해 지속적 지원을 하고 있다. 제71회 칸은 나딘 라바키의 <가버나움>은 심사위원상,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만비키 가족>은 황금종려상을 주었다. 나딘 라바키는 너무 많은 주제로 모두가 좋아할 만한 감동에 천착하느라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진 비판의 대상, 중심에 좀 더 다가가지 못했던 건 아닐까.
“개도 출생신고서는 있다.”
우리나라도 2014년부터 생후 3개월 이상 된 개는 관할 시·군·구청에 반드시 그 출생을 등록하게 하고 위반 시 벌금을 물게 하는 ‘반려동물 등록제’가 있다. 고견(故犬)이 된 우리 개도 그런 출, 사망 신고를 했다.
여기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아이들이 있다. 무계획적인 섹스와 임신으로 무책임한 출산을 반복하는 부모들은 애들을 학교에도 안 보내고 출생신고조차 안 한다.
출생신고서란 무엇인가? 이 사회가 나를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증표다. 나, 우리의 존재는 '신분증'으로 존재한다. 태어나는 것만으로 다 자기 가치가 있고 존재성 있다는 말은 정말 개 껌 씹는 소리다. 내 존재는 신분증과 기본 생존권, 타인과의 교류와 인정으로 그 존재감을 얻게 된다.
<가버나움>에 등장하는 사람 대부분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다. 영화 속에서 (신분증으로) 제대로 존재하는 사람은 심사관, 판사밖에 없다. 나는 “개도 출생신고서는 있다”라고 했지만, 영화 속에선 “케첩 병도 이름이 있다. 제조사와 유통기한이 찍혀 있어”라는 말로 신분증의 사회적 기능을 역설한다. 영화 속에서 자인의 아버지는 “서류 없는 삶은 벌레, 기생충과 같다”라며 울부짖는다.
영화를 보던 도중엔 ‘아동학대’ ‘가난’ ‘난민’등의 고난과 '혈연을 넘어선 연대’로 읽었다. 글을 쓰다 보니 이 영화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신분증’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주요 등장인물의 공통점은 애고 어른이고 신분증이 없다. 병원 치료를 거부당하고 월급을 떼이고 어린 자식과 생이별을 당하고 식량 수급조차 못 받는 것도 다 신분증이 없어서다. 불행의 정점인 그들이 최소한의 기본권을 갖게 된 것도 신분증을 손에 쥐고 나서였다. 영화 속 배우들은 실지로도 난민, 불법 체류자들로 하나같이 신분증 없는사람들이었는데 칸 수상 직전에야 신분증을 획득할 수 있었다.'영화 같은' 일이다.
“아이들은 병에 걸렸을 때만 죽는대”
영화 제목인 ‘가버나움'은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지만 한때는 예수가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장소란다. 형식적 율법만 떠받들고 반성하지 않는 자들에게 큰 실망을 한 예수가 멸망을 예언한 곳으로 버려진 땅, 카오스, 지옥의 개념으로도 쓴단다. 교도소 장면에서 여러 신을 모시는 죄수들 기도와 자선 공연을 하러 온 각종 종교 단체의 모습이 다소 희극적인데 ‘율법뿐인 종교, ‘이 지옥에서 그 많은 신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가'를 묻는 같았다.
영화의 배경은 현재의 레바논으로 영화 중간중간에 부감으로 훑어 나오는 더럽고 빽빽한 폐허 같은 슬럼가 전경과 등장인물들 삶이 곧 가버나움, 버려진 땅, 삶이다.
‘케첩도 이름과 유통기한은 있다’란 대사가 나온 영화 속엔 유통기한 없는 고통이 즐비하다. 동생의 매매혼을 막지 못한 자인은 결국 가출한다. 무작정 버스에 올라탄 자인은 차창 밖으로 스치던 한 놀이동산에 내린다. 종일 굶으며 밥과 일자리를 찼던 자인은 그곳 식당에서 일하던 라힐을 만난다. 라힐은 이디오피아에서 온 불법 체류자로 여기 오기 전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다 그곳 경비원과 몸이 맞아 임신했다. 애인인 경비원은 부잣집 담은 지켜도 제 가족은 안 지킨다.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애들이다. 성인 남자들은 대체로 무능, 무력하고 불성실하면서 성욕에만 충실하다. 안 해야 될 짓을 하고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해야 할 말과 일을 하는 성인 남자는 거의 없다. 노동, 연민과 연대는 아이와 여성 사이의 일이다.
라힐은 임신이 들켜 추방되고 애를 뺏길까 봐 도망 나와 출산했다. 가짜 신분증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 놀이동산 식당에서 일하면서 화장실에 아기를 숨겨놓고 전전긍긍하던 중 자인을 만난다. 천성이 여리고 인정 많은 라힐은 자인을 집에 데려와 아들을 돌보게 하며 같이 산다. 어느새 라힐의 위조 신분증도 재발급 기한이 다가온다. 우여곡절 끝에 고액의 위조비를 마련한 날 라힐은 체포된다. 사연을 모르는 자인은 아기 요나스를 안고 끌며 거리를 헤매던 중 꽃 팔이 소녀 메이소운을 만나 난민 신청 얘기를 듣는다.
'내 방도 있고 왜 왔냐고도 안 묻고 아이들은 병에 걸렸을 때만 죽는다'는 곳.
자인은 난민증을 사기 위해 엄마한테 보고 배운 마약 제조를 한다. 가짜 처방전으로 산 환각성 약을 빻고 갈아 주스로 만들어 판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요나스의 기저귀와 우유를 구하던 자인은 한계에 처하고 결국 브로커에게 요나스를 팔게 된다. 난민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요나스까지 팔았는데, 가짜 신분증을 만들려면 진짜 신분증을 가져오란다. 이 영화에서 ‘글자’는 대부분 ‘가짜’ ‘위조’로 존재한다. 신분증도 가짜고 약물 처방전도 가짜다. 가짜 어른들은 별 죄의식 없이 애들을 가짜에 합류시킨다. 가짜 처방전을 주고 가짜 약, 가짜 신분증을 사고팔게 한다. 출생신고서도 없이 태어난 애들은 문맹의 삶 속에서 가짜 삶을 배우며 살아간다. 가짜 어른들이 제 책임을 회피할 때 자인은 지옥 같은 삶 속에서도 아기 요나스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 내 부모를 고소합니다. 애를 그만 낳게 해 주세요”
<가버나움>은 법정 장면으로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다.
“나를 낳은 부모를 고소합니다”
신분증을 찾으러 집으로 간 자인은 여동생 사하르가 팔려간 얼마 뒤 임신 중 과다 하혈로 죽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자인은 식칼을 빼 들고 사하드를 찾아가 칼을 휘두르다 중상을 입혀 살인미수로 체포된다. 열악한 수감 생활을 하던 자인은 감옥 안의 TV에서 생방송 시사 고발 프로를 보게 된다. 교도소 복도의 공중전화에서 “나를 낳은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라며 포문을 연다. 자인은 교도소에서, 법정에서 낳아놓고 책임지지 않는 부모와 세상에 외친다.
“애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사는 게 개똥 같아서 내 신발보다 더러워요. 지옥 같은 삶이에요. 통닭같이 구워지고 있어요. 인생이 좇같아요.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뱃속 아기도 나처럼 될 거예요. 애를 그만 낳게 해 주세요.”
영화 내내 같은 옷만 입고 나오던 자인은 ‘내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라고 외친 법정에서 처음으로 옷이 바뀐다. 현실을 담은 것이긴 해도 아이들을 표현한 일부 장면은 불편했다.외모고 연기고 도저히 안 빠지기가 힘든 꼬마 주인공 자인의 스타성에 기댄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몇몇 장면도 있었다.
주인공들의 고난이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영화처럼' 한꺼번에 다 해결돼 버리는 결말은 영화적으론 감동적이지만 현실과 달리 너무 쉬운 결말이다. 가난이나 난민의 문제를 제도나 국가 간의 분쟁에서 온 문제는 외면한 체 온정주의에 기댔다는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