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하는 삶 말고 존재하는 삶
나는 어릴 때부터 착한 동화가 영 시시했다. 역경 극복기는 그저 성공 교훈담 같고 권선징악은 거짓말 같았다. 그러니 공주 판타지 <소공녀>보다는 노상에서 성냥 팔던 소녀가 동사하는 잔혹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내 취향이었다.
소공녀엔 신파, 통속, 현실과 다른 권선징악 등 내가 싫어하는 요소들이 골고루 들어있었다. 둘 다 ‘부모 잃은’ 아이들이 ‘내 집’ 없이 방황하는 이야기인데, 그 호칭과 끝은 다르다. ‘공주’로 불린 아이는 큰 저택을 다시 찾았는데 ‘소녀’로 불린 아이는 성냥불이 꺼지자 짧은 삶도 꺼졌다. 그 소녀에게 오리털 침낭 있는 작은 텐트 하나라도 있었다면 죽지는 않았을 텐데.
‘집’에 관해서라면 나 또한 할 말이 좀 있다. 나보다 이사 더 많이 한 사람은 잘 못 봤다. 덕분에 내가 14살에 만난 죽마고우 둘은 세제와 휴지를 들고 학년, 해가 바뀔 때마다 이사 간 집 따라다녔다. 일 년에 두 번 이사한 일도 종종 있었다. 내가 산 지역의 행정구역은 총 8개 구인데 7개 구를 떠돌아다녔다. 제외된 구는 예나 지금이나 집값이 가장 비싼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직장 입사 서류로 '초본' 뗄 일이 있었다. 등본상 주소는 현주소와 직전 주소만 올라오지만, 초본은 살아온 세월 동안의 모든 이사 회수가 다 올라온다. 이사 주소지가 한 장에 다 안 담겨 몇 장이 되었다. 벌써 이십 년도 넘은 그때 기억으로 이사 횟수가 삼십몇 번은 넘었었다. 당시 내 나이와 비슷하거나 더 많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집과 이사에 관한 과거의 기억들이 프린트된 등본 위로 따끔거리며 지나갔다. 오십을 넘긴 지금의 내 주소지는 광역시의 행정구역 8개 구를 다 찍은 뒤 경상북도다.
집 없던 먼 나라 소녀들의 동화는 먼 훗날 한국에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집을 가지게 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와 방 한 칸 없는 <소공녀>로.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갖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했던 성실한 앨리스는 결국 집 때문에 죽을(일) 상황을 맞고, 집대신 취향을 택한 미소는 텐트 노숙을 한다. 두 영화에서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빚쟁이고 감옥이다.
(앨리스) “제가 아무리 꾸준히 일해도, 집값은 더 꾸준히 오르더라고요. 그러다 9년째 되던 해에 은행에서 돈을 빌렸어요.”
(미소 후배) “여긴 못 벗어나. 집이 아니고 감옥이야, 감옥! 여기 한 달 이자가 얼만 줄 알아?. 원금 합쳐서 100이야. 월급이 190. 근데 그걸 얼마나 내야 되는 줄 알아. 20년. 매달 100만 원씩 20년. 20년 동안 여기에서 못 나가.”
(미소) “내 인생의 목표가 빚 없이 사는 거야”
영화 <소공녀>는 주인공 미소가 ‘빚 없이 살기 위해’ 하룻밤 몸 붙일 곳을 찾아 유랑하면서 만나는 인간 군상들 이야기다. 동화 속 <소공녀>는 금수저 세라가 조실부모로 갖은 아동학대를 받다가 좋은 인연 덕에 집과 부를 되찾는다. 그러나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변변한 조력자, 제대로 된 방 한 칸도 없이 영화 시작할 때보다 더 가난하게 끝난다.
그런 면에서 영화 제목이 <소공녀>인 것은 반어다. 결국, 주인공 미소의 삶은 동화 속 판타지라는 자인 같기도 했다. 이런 판타지(같은 삶)도 어딘가에는 있을 거고, 그런 삶이 그 자체로 인정받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열망으로 읽혔다.
영화는 각박한 현실을 끊임없이 복기하고 호출하면서 그 현실의 대척점에 미소를 내세운다. 꿈꾸기 힘든 사회, 꿈꾸는 게 무책임과 죄가 되는 사회, 취업난과 주택난, 결혼과 직장, 안정되고 성공한 삶의 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미소의 삶만은 아주 비현실적이다.
마술이나 공상 과학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만 비현실적인 게 아니다. 보통 사람들에겐 힘든 선택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비현실적이다. 상상의 비현실이 아니라 초현실의 비현실이다.
영화를 다 본 뒤에 발견한 포스트 속 <소공녀>의 영어 제목은 Little Princess가 아니고 Microhabitat였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미생물을 지칭하는 미소(微小)의 서식 환경지. 주인공 이름 ‘미소’엔 ~ 그러함에도 'smile'의 미소(微笑)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미생물 같은 삶의 '미립'이란 중의를 품은 것 같다.
미소(微笑, smile)는커녕 썩소 같은 주인공 환경과 상반된 이름 미소가 소설 ‘소공녀’의 반어나 판타지의 연장이라면, 미소(微小, Microhabitat)라는 영어 제목이 이 영화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미생물은 우리 몸에 유익한 세균도 있고 유해한 세균도 있는데 어떤 요소를 만나 어디에 어떻게 서식하느냐에 따라 유해 균도 되고 무해 균도 되는 양면성이 있다.
미소의 유해 균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곳’이다. 집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대상이면 집을 버리거나 떠나거나 안 가지는 것이 미소 서식의 방식이다.
새해가 되자 미소의 유일한 취미이자 사치인 담배와 위스키 값이 옥탑방 월세와 함께 오른다. 가계부 앞에서 그 셋 사이를 오가던 그녀는 과감히 집(방)을 포기한다. 요샛말로 하면 소확행을 위해서 필수품을 포기한 것이다. 철학적으로 포장하면 '자발적 가난'. 집 대신 취향을 ‘선택’ 한 것이라는 게 감독의 변(辯), 혹은 소망으로 들린다.
번듯한 직장, 내 명의의 집, 결혼 등등 한국 사회의 ‘필수품’이 미소에게도 필수품은 아니다. 남의 필수품이 나의 필수품은 아니라는 태도는 소유하느라 내 존재와 자유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삶의 의지, 방식으로 묘사된다. 그 존재와 자유는 소유대신 ‘취향’이다. 이 영화와 미소를 지지한 많은 관객 중 영화관 밖을 나와서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과 존재 방식을 위해 미소처럼 살 이가 몇이나 될까를 생각해 보다 영화가 씁쓸해진다.
가난한 여성이 재벌 2세를 만나 신분 상승하는 캔디, 신데렐라류의 드라마는 갖지 ‘못 할’ 환상에 대한 대리만족일 것이다. 아름다운 젊은 미혼 여성이 자발적 비정규 가사도우미를 하며, 담배와 위스키를 위해 텐트 노숙을 선택하는 엔딩에 대한 지지는 가지 ‘않은’ 환상에 관한 대리만족 아닐까. 그런 대리 만족의 감동은 두 시간 남짓한 극장 안에서 지지를 보내다 영화관을 나오면 내일 아침이면 꺼질 간판 네온 불빛 같아 허망하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만나는 사람 중 특별히 악한 사람은 없다.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인정 속에 속한 사람들일수록 타인의 삶에 대한 간섭과 훈계, 조소는 비례하고 노골적이다.
“너 나랑 결혼하자. 안정감 있고 집 생기지, 가족 생기지. 다 준비돼 있구만”
"그 사랑 참 염치없다. 넌 가족이 없고 혼자만 살아 봐서 모르겠지.”
반면 미소는 그 누구를 만나도, 만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자기와 아주 다른 인생관이라도 판단하거나 충고하지 않는다. 말이 필요한 사람에겐 귀를 열어주고, 휴식이 필요한 사람에겐 대신 일을 해 주고, 온기가 필요한 사람에겐 밥을 해 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무례하게 끼어들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오늘 밤은 어디서 잘까 전전긍긍인 미소가, 만나는 사람 모두와 그녀가 머문 장소 곳곳을 오히려 온기로 물들인다. 그녀가 사람들을 응대하는 방식은 내가 흉내도 못 낼 일이지만, 타인의 삶과 취향을 향한 존중을 기억하는 것만도 좋은 일일 것이다.
이 영화는 '집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면서 나만의 '스타일'과 '타인의 취향'에 관한 얘기였다.
담배 한 모금, 위스키 한 잔과 맞바꾼 방 한 칸을 잃고, 고만고만한 사정의 옛 친구들 집에서 동가식서가숙 전전하던 미소가 마지막에 들린 곳은 가사도우미까지 둔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전업주부 선배네다. 기식하는 곳이지만 처음으로 전망 좋은 창과, 사적 공간이 보장된 안락한 침실까지 얻었다. 덕분에 굳은 집세로 돈도 차곡차곡 모인다. 피를 뽑아 영화표를 얻던 가난한 연인과 꿈에 그리던 맛집 탐방에 나설 만큼 좋아졌는데 기분이 자꾸 찜찜하다.
“그런데 기분이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해.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 같아.”
미소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된다. 그 집을 마지막으로 유랑 기식을 끝내고 마련한 노상 숙소 텐트를 멀리서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미생물을 지칭하는 미소(微小)의 뜻처럼, 주인공 미소는 누구에게 ‘보여주는’ 삶 대신 내 마음을 따라 ‘존재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 존재의 최소 생활단위인 마지막 서식지가 빽빽한 고층 아파트 숲 맞은편 한강 노숙 텐트다. 어두운 밤 속의 노란 텐트 빛은 달팽이 같았다. 등에 집을 업고 바다로 모래 섞인 땅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목민 달팽이.
영화는 꿈과 취향을 가지는 게 ‘염치없는 짓’이라는 각박한 현실을 보여주면서 ‘꿈꾸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도 묻는다. 꿈이 없고 꿈꾸지 않는 사람은 과연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냐? 꿈이란 무엇이며 그건 누가 정하는 것이냐? 미소는 희생과 규모, 담보가 큰 불확실한 미래적 행복인 집, 직장, 결혼을 거부한다. 작지만 확실한 지금 이 순간의 작은 행복인 담배 한 모금, 위스키 한 잔, 가난한 연애를 택한다.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나 자존감은 땅바닥을 치는 현대인들이 모두와 똑같아지면서 어울리지 못하는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삶을 살 때, 미소는 조화롭되 똑같지 않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삶을 산다. 영화에서 동이불화가 내 집을 가진 말뚝 같은 삶이라면 화이부동은 떠도는 유목의 삶이다.
내 존재는 나 자체가 아니라 내가 가진 소유물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집, 직장, 결혼 등 다수 대중이 가진 걸 나도 가졌냐, 못 가졌냐, 얼마나 더 가졌느냐로 내 가치가 존재하는 세상이다. 소유와 존재는 동일 개념이 됐다. 내가 가족과 친구들의 타박과 한심한 눈빛에도 자가용을 갖지 않는 것, 새 가전제품을 사면서도 아이폰, 양문형 냉장고, 드럼 세탁기를 굳이 외면하는 것, 그 흔한 18K 목걸이 반지 하나 갖고 싶지 않은 것은 소유가 아닌 존재하고 싶은 삶의 한 방식이다.
비현실적 미소의 삶은 소유와 존재가 조화롭게 상생하긴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리라. 넘치는 소유가 자유를 구속하듯 극단적 빈곤 또한 자유를 억압한다. 노숙자인 주인공이 패션 비현실적 비주얼인 것도 영화 속 자유가 환상이라는 반어 같다. 스타일리시하고 아름다운 영상미는 그런 환상을 덧입힌다. 다분히 감독의 의도, 혹은 희망 같기도 한데, 젊은 세대의 '선택적 취향'이 성취하기 힘든 현실에 대한 동화, 환상적 반어라는 말 같기도 하다.
영화 속 미소의 삶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과 별개로 미소 나이의 숫자보다 더 많은 이사를 하고 산 나는 ‘집 없는 자유’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나도 ‘빚지고 구속받는 삶’이 싫어서 미소처럼 집 사는 것에 저항하고 반대했었다. 그러나 내 나이 곱의 세월을 남의 집 설움을 겪은 어머니를 대하며 더는 ‘마음 편하게’ 살고 싶은 내 마음만 고집하기 힘들었다. 첫 집을 가지고 해마다 늙고 아픈 데가 많아지는 엄마를 보고, 해가 바뀌어도 이사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을 대하며 집이 있는 건 이래서 좋구나 싶었다.
자유로운 무주택자의 삶이란 가족, 가정이 없는 미소 같은 혈혈단신이나 가능한 삶일지 모른다-고 쓴 1년 뒤, 취향이 아닌 난파선 직전의 배에서 탈출하는 기분으로 다시 무주택자가 되었다. 무주택자로 오래 산 경험치가 있어서인지 집 없어진 자의 상실감 같은 건 별로 없다.
문득 궁금하다. 이 영화에 열광한 관객 중 ‘한 번도’ 자기 집이 없었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학 입학, 취업, 결혼 등의 분가로 내 소유의 집이 없는 게 아니라 태어나서부터 그 영화를 보는 순간까지 ‘자주 이사 안 해도 되는’ 안정된 집이 없던 사람들 말이다.
어떤 문화에 열광하고 지지하는 모습 속엔 현재의 내 모습이나 삶이 투영되기도 하지만, 결코 그렇게 살지 못(안) 할 사람들의 낭만적 시선이나 대리만족일 수도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미소 삶의 방식을 살고 있는가? 영화관에서는 열렬히 손뼉 치고 막이 내리면 더 많이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어쩌다 한 번씩 저쪽 삶을 염원하지는 않는가?
팍팍한 삶을 사는 이들이 더 따뜻하다. 차별받는 사람이 차별하지 않는다. 소유와 위선은 비례한다는 인물 설정은 도식적이었지만, 감독의 따뜻한 인간관으로 읽혔다. 출연료 A급 스타 배우들은 없었지만, 배우들 저마다 연기 내공이 느껴지는 기본기가 좋고 배우 간 연기 합도 좋았다. 단역마다 캐릭터가 살아있는 건 작은 배역에 대한 감독의 애정, 좋은 시나리오와 연출 덕이리라.
영화 끝나고 감독을 검색해 보니 나이가 영화 속 인물들과 얼추 비슷하다. '내가 아는 세대, 내가 아는 세계,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장점과 한계가 동시에 느껴진 영화였다.
집과 꿈에 관한 <성실한 나라의 엘리스>와 <걷기 왕>을 같이 보면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좋겠다. <소공녀>가 집에 대한 착하고 아름다운 환상극이라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집에 관한 암울한 컬트 잔혹극이다. <걷기 왕>은 모두가 '달릴 때' 나는 '걷는다'라는 느린 삶의 선택과 '꿈꾸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삶을 B급 유머를 곁들여 훨씬 소박하게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