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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Sep 18. 2019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자의 죽음, 살아남은 자의 슬픔


좋은 예술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시대성’이 그 기준 중 하나다. 내가 생각하는 시대성이란 꼭 2019년을 전후한 지금에 한정하지 않고 ‘시대를 넘어서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잘 읽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편제’ 같은 것은 한때 그해를 주름잡던 작품이었지만, 빼어난 영상미와 오정해가 부르는 절창을 제외하면 영화에서 표현된 예술(가)의 의미나 여성상은 지금 눈으로 보면 고루한 면이 많잖은가.

반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출간 연도를 모른 체 지금 읽어도 오늘의 시대성을 담고 있다. 굴뚝 위에서 쇠공을 쏘며 추락사한 곱사등이 난장이 아버지는 고공 크레인 위에서 장기 농성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바로 연결된다. 소설 속에 묘사된 판자촌 철거와 부동산 투기, 노조 탄압과 자본가의 횡포, 갑과 을의 재판 장면 역시 지금의 현실과 겹친다. 또 백 년도 넘은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 역시 직업, 가난, 관계의 단절, 부자간의 갈등과 경쟁, 법에 관한 질문들이 오늘에도 유효한 사유들이다.     



이 세계의 얼룩들


위에서 언급한 리스트에 얹어 그런 시대성을 간직한 작품으로 내가 자주 꼽는 것이 고에다 히로즈의 <아무도 모른다>이다. 1988년에 일어난 일본의 ‘아동 방치사’ 실화를 바탕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2004년에 만들어, 나온 지 15년이 지났지만 오늘의 한국에서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비극이다. 5년 전 송파 세 모녀 사건, 광주 7남매 미취학 사건, 최근의 관악구 탈북 모자의 아사 사건 같은 사회적 참사 혹은 사회적 타살을 대할 때마다 이 영화가 다시 생각났다. '아무도 모르는 자의 죽음'들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다시 주억거린다.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정희진처럼 읽기>에 나온, 김연수가 이 영화를 보고 썼다는 한 인용문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나 이뤄지지 못한 약속의 땅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는 일이 한 번쯤은 찾아오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묻을 땅을 파느라 더러워진 옷, 아니 얼룩진 옷….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만, 얼룩진 마음은 기억에서 잊힐지언정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87쪽)    


영화를 보고 나면 저 문장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임을 아프게 알게 된다.

정희진도 이 영화를 말하면서 ‘얼룩’을 얘기했다. 평화 학자답게,


평화 혹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룩진 옷을 벗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외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행복보다 괴로움이 안전하다. 지켜야 하는, 피곤한 것이다. (88쪽)


얼룩진 인간의 무늬를 살피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말을 한 철학자가 있다. 얼룩진 옷을 벗지 않는 상태, 소외를 일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정희진의 저 말도 ‘얼룩진 인간의 무늬’에 대한 얘기다. 무엇을 지키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발적 얼룩으로 살겠다, 앎과 삶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겠다는 철학으로 보인다. 영화 읽기는 그런 ‘자발적 얼룩으로 살기’ 위한 도구 중 하나리라.  ‘자발적 얼룩’에 대한 저 말과 다짐 경외심을 일으키는 한편, 가난하지 않은 사람의 '자발적 가난'을 가난한 자가 들을 때의 곤란한 마음이 일기도 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자발적 얼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얼룩으로 (오래) 살아야 하는, '지켜야 할 행복' 같은 건 없는 아이들의 얘기다. 부모에게 버려진 네 형제의 12살 장남은 세금을 못 내 단전, 단수된 집에서 자기보다 더 어린 동생들이 줄줄이 굶고 있는 걸 더는 볼 수 없다. 유통기한이 임박했거나 지난 식품을 나눠 주던 동네 편의점 형에게 알바를 부탁하지만, '16살'이 안돼서 일을 못 한단다.

아이들의 사정이 안타까운 편의점 직원이 말한다.

"경찰서나 복지 사무소에 연락해 보는 게 좋지 않니?"

"그렇게 하면 넷이 같이 살 수 없잖아요. 전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많이 고생했었어요."    

이 영화를 몇  봤는데 담담한 어린 장남의 저 말은 볼 때마다 눈물 난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올해 어린이날의 가족 자살, 최근의 탈북 아사 사건도 저 미성년 장남처럼 '같이 살기 위해' 버티다 혼자 살아 내지 못 할 가족을 아파하다 같이 죽어버린 비극 아닐까? 그러니 살아남은 자들의 혀들아! 죽은 자들을 향한 훈계를 함부로 하지 마라. 그들은 죽는 게 쉽고 죽을 용기가 있는 게 아니라 사는 게 더 힘든 것이었으니.

영화 속에서 어린 장남의 무력한,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생 한 명이 죽는다. 그 어린 동생을 친구와 묻고, 땀과 흙보다 더 젖고 꺼메진 맘으로 불도 물도 없는 집으로 돌아갈 때 나오는 노래가 있다. 담담한 곡조의, 결코 담담할 수 없는 가사에서 애들만 있는 집의 수도가 단수될 때, 단수된 줄 알았던 메마른 내 눈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이런 가사, 곡이다.    



악취 나는 보석

「보석 (JEWEL)」    
한밤중에 하늘에게 물어보아도 별들만 반짝일 뿐
마음에서 흘러나온 물이 검은 호수로 흘러갈 뿐
다시 한번 천사는 나를 돌아볼까?
내 마음속에서 물놀이할까?
겨울바람에 눈물이 흔들리고
어둠 속으로 날 인도하네  얼음 같이
차가운 눈동자로 나는 점차 커 가고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는 악취를 풍기는 보석….    

    

김연수가 말 한 ‘이뤄지지 못한 약속의 땅에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고 나오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진 마음….’은 아마 저 장면을 보고 쓴 것이리라. 동생을 묻고 오는 12살 소년이 부르는 노래다. 어린 소년이 겪은 세상은 검고 차갑고 악취 나는 곳이고 천사조차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어둠 속으로 인도하는 그런 곳이다. 그러니 까매진 마음과 얼음같이 차가운 눈동자로 커서 악취 나는 보석이라 말한다. 악취 나는 현실 속에서(도) 보석이 되고 싶은 소년의 마음을 꾸역꾸역 살아남은 우린 차마 알까?    



이 영화로 영화 속 장남은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그해에, 최민식을 비롯한 세계의 명배우들을 제치고 남자 주연상을 받았다. 12살로 최연소 수상자였다. 12살은 영화 속 주인공의 나이기도 하다. 그때의 심사위원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칸영화제에서 수많은 영화를 봤지만 남은 것은 이 소년의 표정뿐이다”



'할 만큼' 하면 '살 만큼'은 돼야지!


같은 작품에 대한 감상과 해석도 수용자의 경험, 공부, 시선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다.

'가족 만사, 부모 무한 책임' 식의 전통적 가부장적 사고자들한테 이 영화는 남성 편력 심한 '모성 부족'으로 인한 아동 학대, 방치로만 성토될 것이다. 반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미혼모, 이혼 후 아버지가 다른 자녀들을 홀로 키우는 싱글맘들은 좀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가부장적 자본과 제도, 사회 통념 속에서 싱글맘들이 애 하나도 아닌 다둥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라고 속으로 항변할 수도 있다.

범죄와 불행의 대부분은 불공정, 무관심, 정서적 차별에 있다고 '남 탓'부터 하는 나 같은 사람은 형식적 법률, 복지제도와 잘못된 관습 때문이라고 분통 터트린다. 자식 버리고 떠나 연락 두절된 전 남편의 소득 증명원이나 제출하라는 억지 법이 모자 자살을 양산하는 거 아닌지 되묻는다.    


영화 속에선 아버지가 다 다른 4남매를 대책 없이 낳아서 기르다 버리고 가 버린 엄마를 '악녀'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처음엔 그녀도 어머니 역할에 ‘열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영화 속 엄마의 가장 큰 죄는 방종한 남자관계나 무능하고 무책임한 양육이 아니고, 무책임한 놈들만 만난 그녀의 낮은 눈과 피임 안 한 무책임한 성관계와 무대책 다산이다.

감독은 아버지가 각기 다른 4남매가 버려져 방치되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지만, 어느 특정 대상을 극대화해서 비난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가 그 최선이 너무 힘들고 지겨워지는 순간 '이탈'한다고 보여준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한때 실시간 검색 상위를 도배했던 홍상수의 옛 인터뷰가 생각난다.

“모두에게 맞고 선이 되는 독자적 어떤 것이란 것은 환상입니다. 어떤 지혜도 그것을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 상황이나 그 앞의 사람과의 '서로 맞음' 만이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빛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홍상수가 만든 영화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다 할 만큼만 하고 살아요."

그러나 그 '할 만큼'은 얼마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가! 그가 당시 어떤 심정, 생각으로 말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러 질문과 대답 중 저 문장이 기억 남아서 메모해 두었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지금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며 지금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모두에게 맞고 선이 되는 독자적 어떤 것이란 없다'라는 홍상수의 말은 맞다.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내가 희생할 것이냐, 내 감정과 행복에 더 충실할 것이냐의 선택일 것이다. 영화 속의 어머니는 '지금' 더 사랑하는 것을 위해, 혹은 '지금' 너무 힘든 상황의 도피를 위해 아이들을 떠났다. 엄마는 자신의 입장, 처지에서는 '할 만큼 했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부모가 혼자 책임질 여력이 안 되거나 책임을 놓을 할 때 국가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남편은 미국에 있고 애는 한 명이예요


영화 첫 부분 이사 장면엔 4남매 엄마가 이사 갈 집주인에게 자식은 '한 명'밖에 없고 남편은 외국 나가 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깊이 이해하는 이는 남편, 아빠 없이 오래 살아본 사람일 것이다.

이 땅에 살면서 서른 이전까지 오십 다 된 지금 내 나이 숫자의 반 이상을 이사로 한세월 보냈다. 내가 영화 속 애들만큼 어렸을 때 내 어머니도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닐 때 집주인에게 저런 거짓말을 했다. 집주인들은 누구 할 거 없이 자식 많은 집, 특히 아들 있는 집은 시끄럽고 방 도배에 낙서를 많이 한다고 세 주기를 꺼렸다. 엄마는 얌전한 딸 둘밖에 없는데도 자식은 딱 하나라고 했다. 집 가진 유세가 심한 시절이었지만 이사 온 다음에 갑자기 생긴 자식 하나 때문에 도로 방 빼라는 집주인은 없었다. 엄마는 워낙에 결벽증이라 세든 헌 집을 새집까지 쓸고 닦았고 우리는 가난한 집 딸들답게 일찍 철이 들어 낙서는커녕 친구 하나 집에 안 데려오고 얌전히 살았다.

엄마는 '남편은 미국 있다' 같은 거짓말은 안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 신랑이 멀리 어디 있다고 한 사람들 대부분은 과부였다. 수십 년 전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법적) 남자 사람  ’은 숨겨야 할 ‘비밀’이나 ‘거짓’인가 보다.



비극적 내용과 달리 영화의 표현은 사뭇 담담하다. 감독의 따뜻한 시선과 달리 아이들의 현실은 아주 차갑다. 집 안의 모든 양식이 다 떨어지고 전기와 수도도 끊긴다. 아껴가며 먹던 라면도 떨어지고 편의점 알바생이 몰래 건네주는 유통기한 다 된 패스트푸드로 연명한다. 전기 대신 촛불을, 화장실은 외부 공공용을, 물은 학교 운동장 수도에서 받아 오고 빨래도 거기서 한다. 아이들은 떠난 엄마를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대신 자기들만의 살 구체를 한다.

감독은 어떤 해석이나 비판의 개입을 자제하고 최대한 현실의 묘사에만 집중하지만 '그래도 삶은 흐르고 살아야 한다'라는 희망을 던져 주고 싶었나 보다. 감독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라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내게는 '살날이 더 많은 날의 고통'이 먼저 다가왔다.    



가장 약자들의 연대와 우정


배다른 남매들의 형제애, 왕따 친구의 희생과 배려심 가득한 우정은 가족, 혈연을 넘어선 연대의 희망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이 아이들에게 작은 온정과 이해라도 보이는 건 대체로 약자들인데, 그중에 12살 장남이 동생을 묻을 때 동참한 여자 친구가 특히 인상 깊었다. 재일교포 2세인 소녀의 기댈 곳(조국, 부모) 없는 신세가 동병상련이다. 버림받은 그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어설픈 위로 대신 그냥 같이 있다. 우산을 씌워 주는 대신, 말없이 비를 같이 맞는다. 약한 것들끼리의 연대였다.    

비극적 내용을 극한 분노나 신파 없이 연출된 절제된 감정선을 따라가다 마지막 장면에서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쏟아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의 제목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르는 것일까, 모르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내 문제가 아니면 불행을 외면하고 싶어 하니까.

정말 두 번 보기는 힘든 영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


나는 '인생 영화'니 '죽기 전에 봐야 할 책' 같은 말처럼 고작, 취향 따위에 인생이니 죽음을 들먹이는 게 좀 웃겼다. 그러니 인생 영화,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지만 '보고 나면 살기 싫어지는 영화' 같은 건 몇 있다. 고라에다 히로까즈의 <아무도 모른다>가 그중 하나다.

사회 복지, 여성부와 관련된 국가 부서에서 꼭 봤으면 좋겠다. 학교 수업시간 영상 교재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중고교에서 문학과 사회 수업을 예술 작품과 연계시켜서 통합 학습, 토론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이 영화를 그런 수업 목록 중 하나로 추천다. 어릴 때부터 가난이 혐오와 낙오의 대상, 징표가 아니고 우리의 친구, 이웃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터득하며 복지란 무엇인가, 연대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토론하는 학교였으면 좋겠다.


싱글맘들이 아이를 버리지 않고 같이 살 수 있는 세상, 같이 죽지 않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가난 증명서를 떼지 않아도 죽지 않는 세상, 연락 끊긴 남편의 이혼 증명서와 소득 증명 요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이 영화를 보며 아프게 다시, 열망했다.     


https://youtu.be/6ZYPlnmhM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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