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주씨 Mar 21. 2024

김밥

유치원 소풍을 가던 날이었다. 일곱 살 평생에 소풍은 첨인데 매일매일 기다렸다. 빨간 머리 앤이 소풍을 기다리는 심정이 너무 이해가 됐다. 소풍은 큰 행사니까 새로 블라우스도 사고 치마도 사고 타이즈도 새로 샀다. 도시락 가방에 들어갈 플라스틱 물병도 새로 샀고 과자도 이미 다 샀다.

엄마는 새벽같이 일어나 김밥을 쌌다.


엄마는 요리를 참 잘했다.

그 가난한 살림살이를 가지고도 매일매일 근사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김밥은 처음이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꽃같이 예쁜 음식이 있을까. 설레서 일찍 눈 떠 보니 쟁반 가득 예쁜 김밥재료가 늘어서 있고 엄마는 도마에다 김을 깔고, 그 위에 참기름 냄새 그득한 밥을 얹고, 색색의 재료를 넣고 손쉽게 쓰윽 말아냈다. 예쁘게 잘라 도시락 통에 빼곡하게 동글동글 들어찬 김밥이 너무 자랑스러워 당장 골목으로 뛰어나가 옆집 앞집 온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날 아침밥은 그릇 가득 올려진 김밥 꽁다리였다.


엄마 김밥에는 간장에 볶은 간소고기 고명과, 계란지단, 간장에 조린 오뎅, 단무지, 당근, 시금치나 미나리가 들어갔다. 햄이 흔해지고 나서는 햄도 들어갔지만 나는 간소고기 볶음이 들어간 김밥이 좋았다. 금방 쉬어서 밖에서 먹기 힘든 미나리나물이 들어간 김밥은 완전 엄마표다.


그 뒤로 김밥은 소풍 아니면 운동회날 아침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어린 눈에도 김밥은 위대해 보였다. 저걸 다 하나하나 어떻게 저렇게 만들어서 김에다 돌돌 말아낼까? 손쉽게 돌돌 말아 칼로 썰어내면 그 옆에 앉아 꽁다리를 홀랑홀랑 집어먹었다. 입 속 한가득 차오르는 맛.


오 학년 어느 날 학교를 갔다 왔는데 엄마가 집에 있었다. 엄마는 창업 준비 중이었다. 엄마는 장롱 속 이불 아래서 조심스레 꺼낸 뭉치를 하나 보여줬다. 태어나서 평생 첨 보는 큰돈이었다. 수표에 동그라미가 몇 개였더라? 가게 계약할 돈이었다. 그 돈을 들고 집까지 오면서 엄마는 가뿐 숨을 내쉬었을까. 어쩐지 좀 상기되어 보였던 엄마.


"경주야 김밥 해주까?"


김밥은 특별한 날에만 먹는 거 아니야? 아무 날도 아닌데 어떻게 뚝딱 김밥이 되는 거야? 지금처럼 김밥천국도 없고 밖에서 파는 김밥도 흔치 않았다. 오후가 갑자기 환해지는 기분. 계란 지단 부치고, 당근 볶고 그렇게 금방 뚝딱 되는 거였어? 방에서 도마 깔고 김밥 마는 엄마 옆에서 뭔 얘기를 그렇게 쫑알거렸을까. 오늘은 아무 날이 아닌데 아무 날인 것 같아지는 행복.


엄마는 김밥을 말며 침착했지만 좀 설렜을지도 모른다. 아마 엄마 평생에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겠지.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사실로 짐작해 보면 그 돈은 사채업자에게 받아온 돈이었던 것 같다. 빚 갚아가며 어렵게 모은 돈에 사채시장에서 빌린 돈을 더해 엄마는 가게를 계약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돈을 장롱 속에다 깊숙이 넣어두고 손이 덜덜 떨리지 않았을까? 맨날 들고 다니던 손가방에 그 돈을 넣고 계약하러 가면서 안 무서웠을까? 뒤는 몇 번 돌아봤을까?


가게를 시작하고 엄마는 바빠졌다. 원래도 바빴지만 훨씬 더 바빠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사라는 게 주인 손 안 닿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안 되는 일이라 그럴만하다 싶은데 열세 살짜리가 뭘 알겠나. 육 학년 가을 소풍에 엄마는 김밥 대신에 볶음밥을 싸줬다. 엄마가 너무 피곤한 얼굴로 미안하다고 엄마가 늦잠을 자서 김밥을 못쌌다고 했다. 조금 서운했지만 김밥 재료가 색색으로 들어간 볶음밥은 평소 먹던 볶음밥보다 화려하고 예쁘고 맛있었다. 선생님이 도시락을 둘러보시다 한 숟가락 그득 맛보시더라. 선생님 도시락 싸서 같이 소풍 오는 엄마들도 있는데 나는 도시락이 김밥도 아니어서 어쩐지 좀 부끄러웠던 것 같다. 쭈뼛거리며 '엄마가 김밥을 못싸줬어요' 하고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었다. 선생님이 맛있다고 웃으셨는데 그제야 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볶음밥을 소풍도시락으로  싸 보내고 하루종일 속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열세 살짜리가 알게 뭔가.


아직도 화사하게 꽃 같던 그 볶음밥이 기억난다. 계란 지단을 마름모꼴로 모양내 잘라 최대한 가지런히 멋을 부린 볶음밥. 엄마 볶음밥 맛있었고 고마웠어요.


이전 06화 우리는 풀잎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