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뭘 좋아했더라 생각해 보면 온통 희미하다. 그중에 콕 짚어 하나 말 할 수 있는 게 있다.
가수 최성수의 노래 <풀잎사랑>
엄마가 집에서 살림만 할 때도 있었다. 아마도 동생도 나도 너무 어리고 애를 봐줄 마땅한 사람도 없던 시절이었겠지. 그 시절 기억 속 골목 풍경에 종종 엄마가 들어있다.
테레비가 종일 나오지 않았다. 낮에는 주로 라디오가 틀어져 있었다.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강애리자의 <분홍립스틱>을 좋아했다. 어린 애가 뭘 알고 그 노래가 좋았는지 모르지. 천연덕스럽게 흥얼거리는 애를 보면서 엄마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엄마가 뭔가 콕 짚어 좋다고 하는 기억이 잘 없다. 그런데 이 노래는 어쩌다 나에게 남았을까.
아마도 라디오를 듣다가 '나는 이 노래가 좋아, 엄마는 어느 노래가 좋아?' 했을까. 엄마는 대답으로 마침 흘러나오던 <풀잎사랑>이 좋다고 했을까? 상황은 다 흐려졌지만 또렷하게 남은 기억에 엄마는 최성수가 좋다고 했다. <동행>도 좋지만 특히 <풀잎사랑>이 좋다고 했다. 라디오에 최성수 노래가 나오는 날이면 엄마는 볼륨을 올렸다. 반색을 하며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자주 듣다 보니 나도 같이 흥얼흥얼 했다. 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주현미도 나쁘지 않지만 어쩐지 세련된 최성수를 엄마가 좋아한다고 하니 어쩐지 우리 엄마가 좀 근사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어른들이 듣는 노래는 이미자 아니면 주현미였으니까. 아 오해는 마시길. 난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 선생님도, 신사동 그 사람도 다 좋아한다. 가사가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기나 했을까 엄마가 좋다고 하니 나도 좋은 거지. 엄마가 즐거워하고 좀 행복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풀잎과 이슬과 햇살이 반복되는 후렴구가 산뜻하고 따라 부르기 쉬웠을 거다. 신났었나 보다.
사랑해~ 그대만을~ 우리는 풀잎사랑~
그렇게 라디오에서 배운 노래들이 많겠거니 짐작만 한다. 전국노래자랑을 보다 보면 나오는 노래들을 왜 나는 거진 다 알고 있는 거지? 일부러 배운 적도 없는데, 언제 들었다 기억도 없는데 어느샌가 나는 부르고 있다. 분홍립스틱을 좋아하던 어린이는 애잔한 그 정서가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귀에 걸리는 대로 몸에 흡수시켰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최성수의 <풀잎사랑>을 들어보는데 2절 가사가 이랬던가 싶다. 1절 가사는 산뜻한 그 느낌으로 대충 따라 부를 줄 아는데 2절은 생전 첨 만나는 기분이다.
'빛나던 노을빛 사랑도 칸칸이 쓰러지고 말았지만 어둠을 홀로 밝히는 나의 사랑 변함없어요'
아니 사랑이 쓰러졌는데 내 사랑은 홀로 어둠을 밝힌다고??? 엄마는 1절이 좋았을까, 2절이 좋았을까.
나이를 먹고 보니 저 사랑이 너무 대단하다. 싱그러운 날들의 사랑이야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는데 쓰러진 사랑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는 건 너무 처절한 애이불비의 정서 아닌가. 그런데 저렇게 산뜻하게 사랑해 그대만을 할 수 있는 일이냐고.
엄마의 사랑은 어땠을까. 분명히 엄마랑 아빠는 연애를 했다고 들었는데 둘이는 별로 사이좋은 날이 없었다. 돈에 쫓기고, 사는 일이 숨차면 사랑도 넝마같이 너절해지고 만다. 당장 애들 밥은 먹여야 하는데, 입히고 간수해 키워내야 하는데, 생활만이 남아서 근근이 악을 쓰고 버텨야 하루가 가고, 달이 가고, 월급이 들어오고 그렇게 다시 내일이 오고 무한히 살아간다. 자식은 커가고, 나는 소녀에서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고 주름이 지기 시작해 큰맘 먹고 산 참존 영양크림을 발라도 뽀송한 그 얼굴은 안 돌아오는데 사랑이 무슨 대수였을까. 매일매일 싸우는 아빠가 징그럽게 미워서 엄마한테 한 번쯤 왜 아빠랑 결혼했냐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빠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을까? 부산에 돈 벌러 나온 시골 아가씨 마음을 흔든 총각은 없었을까? 설마 아빠가 첫사랑인가? 아... 그러면 엄마가 너무 손해잖아?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어쩐지 지금에 와서야 아빠한테 엄마랑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보기는 상황이 좀 그렇다.
둘에게 순정의 시간은 있었겠지. 그러니 그 가난을 무릅쓰고 같이 살 결심을 했겠지. 회사에서 야유회 가는 버스에서 나란히 앉기는 했을까? 아니면 다정해 뵈는 둘을 주변에서 놀려먹고 그랬을까? 집 앞에 바래다주고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 시절 드라마처럼 가로등 밑에서 손잡고 동동 거렸을까? 둘의 연애사는 차라리 엄마 친구 연희이모에서 물으면 좀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연희가 나보다 언니인지 동생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연희이모는 엄마랑 제일 친한 친구였다. 가끔 '엄마 오늘 연희이모 만나고 좀 늦게가께' 전화하곤 했으니까. 연희이모는 엄마 장례 이후에 한 번 다녀가고는 연락이 끊겼다. 핸드폰이 있었으면 '이모'하고 전화를 했을 텐데. 아니다 지금처럼만 좀 유들유들했으면 일반전화로도 그럴 수 있었을 텐데. 근데 그 때는 그게 안 되는 거지.
올 봄에는 꽃피는 날 드라이브 가면서 <풀잎사랑>을 들어야겠다.
엄마 근데 사실 있잖아 난 <풀잎사랑>보다 <동행>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