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이었다.
아침에 두부 심부름을 갔었다. 두부를 사서 오는 길에 동네친구가 노란 유치원모자에 유치원 가방을 메고 인사했다. 아마도 시무룩했었나 보다. 동생이랑 나는 유치원에 안 다녔다. 그때는 그냥 종일 골목으로 뛰어다니다 배고프면 집에 가 보온밥솥에 들어있는 밥 대충 꺼내 먹고 다시 내성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뛰어가서 놀거나 그게 다였다. 그 노란색이 너무 선명했었나 보다. 나는 좀 풀 죽어 집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부모님은 왜 그러느냐 물었겠지? 그다음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어느 날 아빠랑 동생이랑 같이 손잡고 선교원에 갔다. 엄마랑 아빠는 풀 죽은 아이를 그냥 둘 수 없었겠지. 내년에는 학교도 가야 하니까 글자라도 가르치자 생각을 했었을까. 동네에는 절에서 운영하는 부설 유치원도, 놀이터에 그네가 있는 유치원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원 입학도 끝난 봄날에 일곱 살 다섯 살 두 아이를 같이 받아주는 데는 없었을 것 같다. 엄마는 딱히 종교가 없고, 아빠는 불교신자였지만 종교가 무슨 대수였겠나 싶다.
쭈뼛거리며 인사했겠지? 내일부터 아침에 동생이랑 손잡고 여기로 온다! 나도 유치원 가방이 생겼다!
나는 동네에 있던 내성교회 부설 선교원 1회 입학생이다.
아빠는 회사가 멀었다. 아침에 두 아이 깨워 밥 먹이고 입혀 등원까지 오롯이 엄마 일이었다. 세수하다가도 세숫대야에 물장난 치기가 일쑤인 애 둘을 챙겨 출근까지 하려면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근데 거짓말 같이 엄마는 아침에 동화책을 읽어줬다.
테레비 장 위에 책장이 있었다. 아빠가 사준 전집 동화책이 빼곡하게 꽂혀있었다. 우리 아빠는 세상 귀 얇고 동네에 약장사가 들어오면 누가 저런 걸 사냐 하며 웃고 넘길 온갖 건강보조식품, 정체불명 물에 타먹는 가루 같은 걸 사 오는 사람이다. 그런 아빠가 월부책장사한테 껌뻑 넘어가 말 그대로 호기롭게 지른 세트였다. 그 책 세트가 들어오고 엄마랑 아빠는 부부싸움을 했다. 엄만들 왜 안 사주고 싶었을까. 근데 그 책 세트가 좀 거해서 지금 생각해도 한 두 푼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 당시로 획기적인 공룡모형, 동물모형도 들어있었고 세계명작동화에 이름 올리는 온갖 책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다시 무를까 봐 조마조마했다. 단칸방 살림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해서 지금 생각하면 '개 대가리에 옻칠이다'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동화책세트는 나의 자랑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유치원 가방을 메고 무슨 비밀 작당이라도 하는 것처럼 동생이랑 나는 테레비 앞에 바싹 붙어 앉았다. 엄마도 출근 준비를 다 마친 모양으로 책 한 권을 내린다. 좀 과장스럽게 엄마는 동화책을 읽어줬다. 흑백 다큐 속에서 갑자기 3D 팝업창처럼 칼라풀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다. 이미 구석인데 동생이랑 나는 더더더 작게 작게 몸을 움츠리고 꼬옥 붙어 앉아 엄마를 올려다보며 돌고래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다.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무슨 책을 제일 좋아했을까 그런 건 별로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양쪽으로 엄마 손 잡고 선교원에 간다. 내성교회 옆에는 멋들어진 돌담 위로 나무가 늘어진 근사한 양옥집이 한채 있었다. 아마도 그 집 언저리에서 엄마한테 빠빠이~ 손을 흔들고 동생과 나는 동래고등학교 담벼락 초입부에 있던 선교원 방향으로 걸어가고 엄마는 출근을 했었을까? 아니면 우물이 있던 옆동네를 지나 선교원 입구에서 엄마랑 빠빠이~ 하고 엄마는 출근했었을까? 엄마는 온종일 집에서 일곱 살, 다섯 살 둘이서만 밥 챙겨 먹는 게 신경이 얼마나 쓰였을까. 돈이 들어도 선교원에 보내놓고 안심했겠지? 점심도 간식 걱정도 없이 노래도 배우고 글자공부도 하고 그 얘기를 종알종알 귀가 아프도록 자랑했을 텐데 그 얘기 들으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엄마가 책 읽어주는 그 잠깐이 너무 좋아서 나는 당연히 책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이모 집 언니 오빠들이 읽고 물려준 덕에 나한테 온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은 2단 쓰기로 된 글자가 빽빽한 책이었다. 동화책 다음은 그 시리즈였다. 나는 힘 안 들이고 글자를 익혔다. 지금도 사랑하는 빨강머리 앤도, 비밀의 화원도 다 그 시리즈에서 읽었다. 우리 집 다락에 있던 책은 누구 책이었을까. 다락에 있던 세로 쓰기 된 소설책도 종종 읽었다. 한자는 어려워 건너뛰고 어려운 단어는 대충 유추해 넘기며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책을 좋아하는 건 엄마를 닮았다. 엄마는 원 없이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다 이런 비슷한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사는 모양이 녹록지 않아 많이는 몰라도 엄마는 짬이 나면 책을 읽었다. 나중에 남은 엄마 물건 중에 책도 몇 권이 들어있었다. 소설목민심서, 우담바라 1권. 나중에 엄마가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궁금해져 야자시간에 곰곰이 읽어보기도 했다.
엄마는 어느 작가를 좋아했을까?
내가 조금만 덜 까칠한 중2였다면 우리는 그런 얘기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엄마는 책 산다고 하면 두말 안 하고 책 값을 쥐어줬다. 조그만 꼬투리에도 발끈하고 말문을 거의 닫고 신경전 하듯 보내지 말고 좀 다정했었다면 엄마도 좀 숨을 돌리지 않았을까? 왜 하필 사춘기였을까. 시간이 얼마 없는데.
한 번씩 전화로 내성교회까지 좀 내려올래 하면 엄마 마중을 나갔었다. 손잡고 걸어올 때면 엄마는 가끔 그런 얘기를 했다.
‘니가 스무 살이 되면...'
그렇게 시작하는 얘기들. 내성탕 골목을 지나, 목련이 흐드러지게 담장 밖으로 늘어선 그 집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던 시간 엄마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