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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y 06. 2024

그래 해보자 결혼

근데 아직,

어제부터 사귄 걸로 하자고 하는 말에 넙죽 좋다고 해놓고 내 고민이 시작됐다. 


이 남자는 나랑 결혼이 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더 말을 못 하고 있었던 거다. 


솔직히 남자도 연애도 흥미를 꺽었었다. 그러니 당연히 내 인생 경우의 수에 결혼은 없었다. 

너무 갑자기 다양한 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치 연애까지도 이렇게 어렵게 도착했는데 갑자기 결혼까지?? 심지어 이 상황에??? 

간단히 두어 줄로 얘기하기 복잡한 여러 사정이 얽혀 내 금전상황은 매일 가파르게 마이너스를 갱신하고 있었다. 그치 이 타이밍에 결혼이라니. 심지어 코로나는 날로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어려운 때 마음을 기대고 함께 버텨온 사람 참 고맙고 고맙다. 그런데 결혼은 좀 다른 문제다. 이 상황을 다 안은채 내 지옥도 속으로 그자를 끌어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아직은 마냥 니가 좋아! 헤헤~ ' 하며 넘기기에는 그자도 나도 나이가 많았다.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인데 내가 결혼은 아니라면 더 정들기 전에 놓아주는 게 맞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아니다, 쉽게 생각하자. 


그 와중에 같이 있는 날은 너무 좋았다. 그전에도 같이 있었지만 마음이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편안했다. 아무 때나 손 잡을 수 있다고. 아 진짜 이게 뭐라고. 십 년 안에 이렇게 맘 졸이며 손잡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냐 말이다. 나 혼자서 하는 결혼에 대한 고민이 무색하게 그자는 다정했다. 상황은 날로 날로 어려운데 같이 있으면 너무 편안하고 달달해서 그 어려움을 자주 까먹었다. 그렇게 에너지를 채우면 다시 고단한 일을 해치우고 그자를 만났다. 조금씩 더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며 너나 나나 빈손이구나 하는 상황을 마주하자 오히려 가벼웠다. 


'같이 있고 싶다' 


그게 다였다. 내 결혼 결심은 거기서 시작이었다. 나랑 상의도 없이 자기 혼자서 결혼까지 생각한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고 결심은 뒤늦게 그리고 생각보다 싱겁게 결론에 도착했다. 

그래 해보자 결혼. 


그렇다고 당장 결혼 관련한 얘기가 진행될 상황은 아니었다. 코로나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고 전국의 예비부부들은 결혼식 초대손님을 줄이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세상은 시끄러웠고 우리는 천천히 우리의 현재를 확인할 뿐이었다. 운전하고 지나다 무심결에 시작된 얘기에 서로의 통장 잔고를 까고, 술 마시며 시작한 얘기에 가족들의 상황과 안부를 알리고 속 깊은 얘기를 켜켜이 쌓아갔다. 감정적인 동요 없이 상대를 괴롭히지도 않고 스며들듯이 익숙해지는 사이. 부끄럽지만 이렇게 안정적인 연애는 평생 첨이다. 살아온 모양과 시간이 그러했기에 불쑥불쑥 어딘가로 그자가 사라지는 건가 하는 불안이 불쑥 드러나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없는 얼굴로 가만히 곁에 있는 그자는 내 불안의 시작점을 서서히 무너트렸다. 그래 이 사람은 나한테 등을 돌릴 사람이 아니지 하는 믿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불안과 부끄러움과 함부로 들키고 싶지 않은 못난 구석까지 천천히 공유해 나갔다. 


21년 추석, 집에 폭탄을 던졌다. 


결혼 할 사람이 있다!
 


우리 집 누구도 내 결혼을 생각해 본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말 그대로 동공지진, 난리가 한바탕 났었다. 사십이 넘도록 여태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도 한 적이 없었으니 내 얘기는 고려해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한다는 통보였다. 아버지는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셨다. 


거창한 통보를 했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는 사실 아직도 결혼은 못했다.  


내가 결혼식에 환상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서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아직이다. 미끄럼틀을 타기 시작하니 모든 상황은 한꺼번에 나빠졌다. '돈 없이도 시작할 수 있어. 마음이 중요하지.' 주변에서는 대체로 그렇게 얘기를 했다. 알지, 나도 알아.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해주는 걱정과 조언인지 알기에 그냥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담담하게 웃었다. 근데 진짜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내 지옥에 밀어 넣고 당장 오백만 원이 없었다. 오백만 원이 있으면 지옥 바닥을 다지는데 쓸 판이라 쓰게 웃을 뿐이었다.  복은 타고나는 거랬는데 나는 타고난 복이 좀 없나 보다. 내가 돈 쓸 일이 생기면 항상 집이 어려웠다. 매번 그래서 그런가 보다 반쯤 체념하긴 했지만 하필 결혼 생각을 하니 하다 하다 집이 망하기 직전이다. 어쩔. 


진짜 근데 뭐 어쩔. 


우리는 그냥 그럭저럭 잘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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