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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Apr 29. 2024

어제는 십일월 십일


 이 남자는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나랑 연애 중인가!!!


종일 애끓이다 받아 든 카톡 내용이 그랬다. 아니 왜 그러니까 나한테 말을 안 하냐고. 그간 안절부절못했던 시간이 그냥 에피소드처럼 눈앞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내가 혼자 한 삽질은 아니었다는 안도감과 상대를 향한 감정이 일방향이 아닌 걸 확인한 기쁨에 잠들지 못했던 지난밤의 피로가 싸악 사라졌다. 그 어이없는 안도감이 너무 좋아서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퇴근시간까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지나갈까.


나이가 가진 무게를 그자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고지식한 이 남자는 집 한 칸 없이 나를 만나도 되는 건가 고민을 했더란다.  보통의 사십대라면 누군가를 새로 만난다는 건 자연스럽게 결혼 문제가 같이 연결되기 마련이다.  여기 계속 있을지, 서울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도 변수였다. 하던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아 그자도 나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여유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나이에 그자도 나도 빈 손이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돈은 있다가도 없어. 전부가 아니야,  말은 쉽지만 정작 살아가며 세상의 잣대를 전부 신경 쓰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모른척하고 살다가도 손톱에 생긴 거스러미처럼 존재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힘이 세다. 각을 재고 뒤를 생각했더라면 아마도 시작하지 못했을 연애.

어쩌다 보니 갑자기 쏟아진 마음은 그럴 경황이 없다. 곁가지를 다 내려놓고 '이 사람이 좋다'에 집중하니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다. 각자 나름의 풍파를 거치고 뭔가 약간은 낡고 지친 상태에서 우리는 서로의 곁에 서기로 결심했다.


저기 멀리서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서 있는 그자가 새로운 날이었다. 어제의 불안이 말끔히 사라지게 만드는 웃는 얼굴. 심장이 뛴다.


"손"

맨 정신에 처음으로 꺼낸 말. 좋은데 쑥스러움을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더라.

아니 말을 해줘야 알꺼아니냐고, 왜 나랑 말도 없이 연애 중이냐고 물어봤지만 그자는 그냥 웃기만 했다. 지도 쑥스럽겠지. 귀여워라.

같이 저녁을 먹고, 맨 정신에 손잡는 게 어색하긴 나나 그자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알겠냐고 마흔이 넘어서 손잡는 일이 이렇게 길고 오래 걸릴 줄. 그리고 그게 이렇게 식은땀이 날 줄. 누군가와 손잡고 걷는 일이 어떤 건지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이게 이렇게 각도가 안 맞고 호흡이 안 맞는 일이었어? 그자는 손이 두꺼운 편이다.

아닌가 보통의 남자들 손두께가 다 이 정도 되는 건가? 내 손도 꽤 두꺼운 편이라 자꾸 어색하기만 한다. 온몸의 신경이 손으로 쏠린 기분이었다.


밥 먹고 느릿느릿 동네를 좀 걷다 카페에 갔다. 어색한 얘기를 마무리 지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봄부터 길기도 길었지. 한 해 마무리가 다 되어갈 시즌에 들어서야 겨우 이만큼 왔으니까.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우리가 좀 이상하긴 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드디어 우리는 사귀는 사이인 건가, 각자 말 못 하고 보낸 시간이 길어 우리가 언제부터 시작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어색할 수가!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서도 우리의 시작이 언제인지 결론 내지 못했다. 주말에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맨 정신에 기분 좋게 취한 느낌.


다음 날 그자의 카톡,

"어제부터 사귄 걸로 할까요?"


나는 좋다고 했다.


이전 09화 그럼 나는 멈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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