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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Apr 15. 2024

해지는 풍경을 같이 보는 일

20년 늦봄과 초여름의 경계 어느날,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갔었다.

자궁근종이 있었고 2년에 한 번 건강검진 자궁경부암 검사 할 때 초음파를 보는 느슨한 추적관찰을 하고 있었다. 그 해는 병원을 바꿔 직장근처 산과에서 오래 근무하시던 선생님이 독립해 개원한 작은 산부인과에 들렀다. 노령인구가 많은 동네라 검진 위주로 하시기 좋다고 판단을 하셨나보다 생각을 하며 처음으로 갔다.

여느때처럼 자궁경부암 검사를 하고 초음파로 근종의 안부를 확인했다.


결과는 무서웠다. 나이를 확인하고 아이가 있느냐 물으셨다. 아니라고 하니 근종이 너무 자라 자궁적출을 해야할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고 했다. 큰병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이야기를 하고도 마음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몸에 칼을 덴다는 공포와 함께 내내 귀찮다고 멸시했으나 만약에 자궁이 사라진다면 생각을 하자, 평생 여자로 살아온 삶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 같은 상실감이 동시에 몰아쳤다.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라고 늘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내 여자로서의 정체성은 태어나 자라 평생을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자리한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었다.  병 앞에 우선순위가 뒤집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나였다.


그자가 보고싶어졌다. 평일 오후, 다대포 해지는 풍경을 보러가지 않겠냐고 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다대포는 부산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먼 곳이다. 어느 해 문득 달려가 해지는 풍경을 보고 온 이후로 어쩐지 마음이 부대끼는 날이면 다대포까지 날아갔다. 해지는 풍경을 앞에 두고 단단한 모래사장을 말없이 오래 걸었다. 이미 술은 나쁘지만 두어잔 더 먹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맥주 한 잔 하자고 했다.


내내 목이 탔다. 단숨에 맥주를 시원하게 거의 한잔을 다 마시고 "사실은..." 하고 운을 뗐다. 평일에 갑자기 가자고 하니 어쩐지 무슨 일이 있나보다 생각을 했다며 얘기하길 기다렸다고. 이어진 얘기에 그자는 불같이 화를 냈다. 무슨 그런의사가 있냐고, 상태가 이만저만하니 큰병원에 갈 소견서를 써주겠다고 해야지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고, 돌팔이라고 다른 큰 병원에 가야한다고 갑자기 서울권 큰병원 검색을 시작했다. 아니라고 괜찮다고 이미 병원과 의사를 알아보고 진료를 보러갈 계획이라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충분하다고, 고맙다고.


코로나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지만 운이 좋았다. 대기가 길기로 유명한 선생님께 예약도 없이 찾아가 초진을 한시간 이내로 볼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검진을 취소한 시간에 MRI도 찍을 수 있었다. 검사와 진단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근종의 위치와 상태는 생각보다 나빴고  말그대로 자궁을 절제하는게 좋은 상태였지만 선생님은 해보자고 하셨다. 수술일정까지 한달여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부모님께 상태를 설명하고 내일 입원하고 모레 수술한다고 통보했다. 나는 어느때보다 차분했다.


"내일 병원에 데려다 줄까요?"

우리집에서 병원까지는 버스 승하차 지점에 따라 길어야 서너코스 거리다. 당연히 혼자갈 생각이었다. 그자의 제안에 울컥 마음이 요동쳤다. 입원결정까지 매일 안부를 물어주는 그자가 크게 의지가 됐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병원은 너무 가깝지만, 그자는 일부러 한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와야하지만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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