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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Apr 08. 2024

어정쩡한 날들

파도에 떠밀려간 신발은 어디에 도착했을까

그렇게 술 마시고 헤어진 새벽이 시작인가 했다.

아... 근데 그자는 어정쩡한 느낌이다. 갑자기 나도 브레이크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아니야? 그럼 손은 왜 잡아?’

아 내가 진짜 나이 마흔 넘기고 이럴 줄 몰랐다. 유치하게 땅을 파기 시작하는데 뭐라고 말을 못 하겠더라. 나이 먹었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더 멈칫거리고 있었다. 오히려 나이가 발목을 잡고 점잖은 척 버티는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현타는 자주 세게 왔고 전공을 살려 삽질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술 먹고 대리운전을 하거나 택시를 타면 그자는 집 앞까지 나를 바래다주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코로나는 점점 심해지고 딱히 갈 데가 있어야지 우리 집으로 그자를 초대했다.

송정, 해운대로 이어지는 온 동네 산책코스를 도장깨기하고 집에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술 마시고 이건 그냥 봐도 집데이트인데 말이다. 그자는 점점 더 천연덕스럽게 책방에 깔아준 이부자리에서 내 옷을 입고 곱게 문 닫고 잤다.

그렇게 드문드문 여태까지 하던 대로 밥 먹고 차 마시고 술 먹고... 아이고... 시간을 어지간히도 잡아먹었다.


그사이 계절은 가을로 넘어갔고 그자의 친구 커플이 부산으로 여행을 왔다.

그즈음 내 속은 반쯤 포기. 아이고 그래 이러고 있다 그냥 너의 본거지로 돌아가라 그런 마음. 같이 있으면 좋지만 그다음을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나를 누구라고 얘기를 했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 상태로 만난 그자의 친구는 당연히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아 진짜 이건 무슨 미친 말도 안 되는 상태냐고 하아~~~


편하게 그냥 지내는 거 나쁘지 않잖아? 할 수 있다. 은은하게 썸타는 거 충분히 이해한다. 그럴 수 있다. 근데 이게 내 일이다? 어쩐지 이 관계에 집착모드로 돌입한 나는 그런 거 안된다. 내가 아무 사심이 없다면 그럴 수 있겠지. 쿨하지 못한 인간인 나는 전전긍긍 모든 드러나는 반응들이 시그널 인듯 세포까지 다 동원해 그자를 바라봤다. 좀 징그럽나? 쿨한거 그런거 어떻게 하는건데?? 나는 질척거리다 못해 너절해져서 나한테 질려갔다. 그런데 놓고 싶지 않아. 지질한 연애가 이러다 망해나가는 거 아는데 근데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술은 적당히 먹었고 둘씩 컴컴해진 해운대 바다를 한없이 걸었다. 신발 벗고 바다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자 를 따라 신발 벗고 옆에 섰다. 반쯤 맨 정신인데 내가 먼저 손을 잡았었나 보다. 그러고 한참 걷는데 신발을 놓쳤다. 한 짝이 파도에 휙~ 휩쓸려 떠밀려가고 가을바다 파도는 신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치고 있었다.

아이고 될 대로 돼라~~ 나머지 신 한 짝도 바다에 냅다 던져버렸다. 어딘가로 떠밀려가겠지.


"편의점에서 슬리퍼 사다 줄게요."

그자에게 카드를 내밀자 카드가 있다고 했다.

"신발사주면 헤어지는데요?"

" 아~ 그렇구나~"


그자의 친구는 '경주 씨 다음에 만나요' 하고 인사했다. 발이 달그락 거리는 삼선슬리퍼를 신고 최선을 다해 손흔들고 웃으며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그냥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다음'이 걸렸다. 우리한테 진짜 다음이 있어요? 이렇게 멀거니 시간만 보내다 그냥 안녕히 가세요 할 것 같은 마음에 다음이 아주 쐐기처럼 박혔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답답하게 아무 말도 못할까. 

뭐가 무서워서. 

감정과 방향이 어긋나는 일이 뭐 대수라고. 살면서 그 보다 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자꾸만 하찮아져서 자꾸 가라앉기만 했다. 던져서 보내버린 신발 한 짝. 사라지고 싶은 건 나였다.


택시를 타고 같이 집까지 오는데 서로 아무 말도 없다. 어수룩하게 마음을 줘버리고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닫힌 것 같고 사람은 너 하난데 어쩌자고 이렇게 대책없이 이러고 있나 막막해서 밤이 더 캄캄할 뿐이다. 집에 돌아와  읽히지 않는 니 마음이 뭐냐고 불쑥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질문을 누를 때 마다 와인을 퍼마셨다. 남아있던 와인을 콸콸콸 다 마시고 꽐라가 되어 그자는 곱게 책방으로 자러 가고 나도 잠들었다. 아마 둘이서 대여섯 병 마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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