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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처럼 Jan 29. 2019

가보지 않은 여행을 떠나려 해

우리가 입양을 결정하기까지

반대로 걸어가기


"자네 올해 몇이지?"

"부사장님, 뭐 그런 걸 허허허. 올해 마흔 다섯...됐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적극적으로 노력은 하는거야?"

"그게 노력은 하는데, 마음대로 잘 안되더라구요. 사람 만나기도 생각보다 어렵고...."


부사장님과의 회식자리, 결혼을 하지 않은 차장님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관심인지 애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까고 싶은건지 알 수 없는 공격. 차장님은 쩔쩔맸다. 함께 듣는 것이 민망하다. 내 차례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 앞에 놓인 참치회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까지 박차장이 살던 것과는 정반대로 한번 살아봐.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가고, 밥이 먹고 싶으면 파스타를 먹어. 집에만 있지말고 동네 개천이라도 나가봐. 하고 싶은 것, 딱 반대로 일년만 살아보라구.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날테니."  


반대로? 나한테 하는 말 같았다. 꼬박꼬박 갚아야 하는 대출이자와 나만 바라보는 엄마, 틈을 주지 않고 쏟아지는 프로젝트, 비열한 상사, 시기와 오해로 똘똘뭉친 사람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이내 돌아오는 아침. 옷한벌 제대로 사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나. 정말 반대로 하면 이 모든 것과 이별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삶의 무게가 죽기보다 고통스러웠던 가을, 궁금함을 해소하기로 했다. 작은 상자에 소지품을 고이 담아 회사를 나왔다. 


다음해 겨울 캐나다 몬트리올, 나는 눈밭에 누워 있었다. 룸메이트가 알려준대로 팔다리를 위아래로 파닥거렸다. 몸집만한 스노우엔젤이 만들어졌다. 솜털 같은 눈이 무성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렸다. 속눈썹에 눈이 얼어 붙었다. 긴 여행을 했다. 해외에 가본 적이 없어 후배가 어학연수를 다녀왔다는 도시로 무작정 떠났다. 눈을 질리도록 볼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늘 하던 결정과는 반대로, 살아봤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 곳으로


몬트리올에 다녀와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출근 할 직장이 없어지고, 통장잔고는 바닥났으며, 그나마 내세울 수 있었던 대기업 간판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지 않았더라면 평생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가질 수 없는 경험들, 해보지 못한 생각들을 얻었다. 그리고 가시인 줄 알면서도 빼내지 못했던 일들을 내 손으로 뽑을 수 있는 힘이 자라났다. 6개월간의 무모한 여행은 나의 선택에 따라 다르게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때 내가 살던 방식 그대로 살았다면 여전히 현실을 원망하고 있겠지. 그래서 여행을 간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낯선 곳에서의 하루가 다른 삶에 대한 용기를 줄 것을 알고 있기에.  


"여보, 이번 여름휴가 어디로 가고 싶어?"

"글쎄.... 우리 일본에 갈까? 이왕이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결혼 후, 일본은 여행지 후보에서 늘 제외였다. 언제 임신을 하게 될지 모르니 방사능 위험이 있는 곳은 무조건 안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불임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홀가분 할 줄이야. 막상 아이갖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지니 방사능 따위 상관없었다. 무작정 가자. 항공 사이트를 검색했다. 가장 낯선 곳을 골랐다. '오키나와'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경차 한대를 빌려 오키나와 곳곳을 달렸다. 숲속 구비구비, 꽁꽁 숨어 있는 카페를 찾아 차를 마셨다. 모래알이 예쁜 바다를 만나면 풍덩- 파도에 뛰어들었다. 동그랗고 귀여운 도넛을 마음껏 먹었다. 낯선 바다와 산, 거리, 사람들. 어색함 속에서 자유로움을 누렸다. 섬이라는 사실 하나만 알고 떠나서일까? 마주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뒤지고 꼼꼼한 계획을 세웠더라면 어땠을까. 길을 잃을 일도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없겠지. 하지만 뜻밖의 순간에 예기치 못한 기쁨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위치도 알지 못하고 들어간 남루한 숙소는 인적이 드문 바닷가 앞이었다. 덕분에 우리만의 프라이빗 해변을 매일 아침, 무료로 즐겼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조깅하는 동네 아저씨의 탄탄한 근육에 자극을 받아 다음날 덩달아 달리기도 했다. 출출해서 들어간 편의점에서 인생어묵을 만났다. 더위 끝에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꼭 잡은 신랑의 손이 다정하다는 생각을 했다. 


"있잖아. 나 지금 천국에 누워 있는 것 같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만약 하나님께서 천국의 모습을 선택하게 해주신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어도 좋을 것 같아."


이름도 예쁜 에메랄드 비치, 나는 바다 위 튜브에 누워 있었다. 쨍한 햇살이 눈이 부시고 바람이 기분좋게 살랑였다. 눈을 감았다. 지난 몇 년간의 우리를 생각했다. 말과 표정을 잃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던 내 얼굴, 서재에서 홀로 흐느끼고 있던 신랑의 어깨. 그리고 보육원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아기들의 웃음. 아이 갖는 게 뭐라고.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낳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엄마가 되고 싶었던 걸까. 


옷을 갈아 입고 차에 올라탔다. 시원한 에어컨이 반갑다. 시동을 걸고 점심 먹을 곳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에 흘러가는 나뭇잎에서 싱싱하고 맑은 향기가 나는 것 같다. 무심히 입을 열었다. 여행을 오기 전부터 고민했던 말을 이제는 꺼내도 될 것 같다. 


"여보, 우리 아기 입양할까?"

"입양? 정말? 정말 그래도 돼?"

"당연하지, 당신만 괜찮으면 난 하고 싶은데, 어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신랑이 쳐다봤다. 먼저 꺼낼 수 없었던 그의 마음을 안다. 


지금처럼 살아도 잘 살 수 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일터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때때로 울적하면 여행을 가기도 할 것이다. 둘이 버니 조금 더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고, 원하면 언제든지 심야영화를 볼 수도 있다. 젊은 시절 겪은 일들로 마음 한켠이 아프겠지만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선택을 해보고 싶다. 그 선택에 어떤 책임과 고통이 뒤따를지 알 수 없지만, 반대로 한번 가보자. 그리고 그 길 위를 함께 걸을 친구가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가. 


2016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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