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덕분 Aug 14. 2022

갖고싶은 게 많아지면 생각이 많아지는데

생각이 많아지면 말을 줄여야 (이 글과 달리) 불필요한 말을 안할 수 있



내게는 좀 희한한 버릇이 하나 있다.

어떤 물건이 사고싶어지면 일단 사고난 뒤에 그 구매후기들-더 정확히는 그 물건의 단점이 무엇인지, 더 나은 제품은 없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끝없이 핸드폰 화면 속을 누비는 것이다.


하다 못해 오천원짜리 주방용 볶음주걱을 살 때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대다

결국엔 처음 본 것과 별다를 것없는 그런 주걱을 사고나서 괜히 한 번 더 인터넷을 뒤져본다.

더 친환경적이고, 더 편리하며, 더 예쁜 다른 것이 있는 건 아닌가 불안에 떨면서.


사기 전에도 찾아보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내 손에 들어오고나면 더욱 가열차게 후기들을 탐독한다.

어떻든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귀한 인연으로 우리가 만났구나' 하며 소중히 여기며 쓰면 될 터인데,

몹시 좋아보이던 것도 내 것이 되고나면 이상하게 꼭 어딘가 부족한 구석이 있는게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왕이면 같은 값에 더 좋은 물건을 사고 싶고,

이왕이면 같은 물건도 더 저렴한 가격에 사고 싶은 마음이야 주부로서 드는 당연한 마음이겠다.

문제는 이런 구매를 계속하다보니 급기야 내 삶 전체가 부족해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어릴 때(아주 모호한 표현이지만 여튼 지금보다 주름이 덜 자글자글했을 때)는 별다른 생각없이 손에 집히는대로 사서 먹고 쓰고 입었던 것같다.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로,

내 하루가 제일 좋을 것이라 생각하며-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 겨를 없이 최고로 즐거워하고 최선을 다해 고민하며 오직 '나'의 하루들을 살았더랬다.


시간이 흐르면서

'너는 몰랐겠지만 다들 이렇게 더 좋은 것을 쓰고 있어' 혹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이게 진짜 좋은 거야' 라는 식의 광고라거나

'다들 이 정도는 먹고 쓰고 즐기면서 살고있어' 라며 각자의 인생을 뽐내는 경주가 내 손 안에서 쉼없이 펼쳐지는 세상이 되었고,

아이를 키우면서 잠깐 쉬는 틈이 생기면 달리 할 일이 없어 스스로 그 우물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남들 사는 세상을 주구장창 들여보다보니 남는 것은 '그들 집에는 있고 우리집에는 없는 것'들 뿐이요,

거기에는 행복을 행복이라 여기지 못하는 불감증이 덤으로 얹어졌다.

그렇게, 정작 '나'의 하루는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건 마치 신의 마법구슬을 훔친 죄로 벌을 받는 죄수가 된 기분이다.

그 옛날에는 산 위로 거대한 돌을 끝없이 밀어올려야하는 벌을 내렸다면,

집에 앉아서도 스마트폰을 들고 앉아 온 세상을 누비는 시대에 걸맞게

그 마법구슬 안을 계속 들여다보며 결코 해소되지 않는 결핍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벌을 내린 게 아닐까.


물론 그 마법구슬을 훔친 게 나뿐만은 아니지만,

인류를 위해 신을 배반할 정도의 위험을 무릅썼다거나 거룩한 공을 세운 것 역시 (당연히) 아니지만,

끝없는 굴레에 갇혔다는 점에서 동질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내 경우에는 철저히 개인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함이긴 하나,

여튼 그 정도로 막막한 심정이라고 하겠다.


허나 아직 살 날이 구만리인데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며 살 수는 없다.

나의 하루를 되찾기 위해 작전을 세워보기로 한다.

전지전능한 신이 그깟 마법구슬 하나 잃어버렸다고 그리 무자비하기만 하랴?




먼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꼽아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아이들.

소중한 만큼 어깨를 무겁게 하는 이 아이들 생각을 한 다리에 하나씩 걸어두면 쉽사리 우물 안으로 뛰어들지는 못하리라. 벌써 아주 든든한 보호장비가 갖춰졌다.




다음으로, 내가 진정으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떠오르는 단어들은 '의미', '행복', '명예', '내실', '지혜', '정의' 혹은 '올바름', '나눔', '포용', '배려', '유머', '즐거움', '몸과 마음의 여유' 와 같은 것들.

이쯤에서 벌써 골이 흔들리는 것지만 몸에 좋은 약이 입에도 쓰다하니 좀 더 용을 써보기로 한다.

평소에 읊조리며 생활하는 단어들은 아닌 터라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온갖 잡동사니들을 밀어내고 솟아오른 가치들인 만큼 내게는 꽤나 중요한 것들이기도 하겠다.


낯설지만 소중한(?) 단어들을 뚫어져라 보며 최우선을 꼽아보자니
'내실' 혹은 '정의' 쪽으로 추가 기운다.

겉과 속이 모두 단단한 사람이 되어 정의로운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은 야망이 숨어있었나보다.


내가 사들였던 물건들로 충족할 수 있는 것은 '즐거움' 정도다.

그마저도 스치듯 다가왔다가 사라져버릴 만족감이다.

들인 시간과 돈에 비해 그 지속시간이 짧고,

굳이 꼽자면 후순위에 위치할 가치에 가장 많은 비용을 썼다는 결론이 나왔다.

복잡다난한 인간사를 어찌 효용으로만 따져볼쏘냐 입을 내밀어보지만,

왠지 뒤통수가 근질근질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빠른 시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아이와 손을 잡고 마트에 갈 때 내 귓가에 '견물생심(見物生心)' 네 글자가 귓전을 맴돌고 있으니,

이쯤되면 내 하루에 '과소비'와 '절제'라는 멀티버스가 존재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다.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가 사건이 해결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는 법.

이 상반된 멀티버스 간 대격돌이 부질없는 소비의 늪에서 나를 끌어내 줄 빨간 구두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매순간 발생하는 충돌로 인해 그야말로 '부질없다'는 깨달음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마련된 보호장비를 두 다리에 걸친 뒤 빨간구두를 신고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내밀어보는데,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꼭 사야할 것같았는데 아직 사지 못한 물건들이 커다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달려든다.

안돼! 이번 달 예산은 이미 초과한 지 오래란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며 사라져간 비명은 다음달이 되면 "이것까지만 사자!"는 다짐으로 되돌아올 터다.

아아, 인간은, 나는 어찌하여 이리도 지독한 소비감옥에 갇혀버렸단 말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화면 하나만 닫으면 그 뒤로 '주문서 상세페이지'같은 것들이 뜬다.

비장한 각오로 단어 하나하나를 눌러쓰다가 잠깐 눈을 돌리면 그리 되고 만다.

이 세상엔 예쁘고, 멋지고, 생활에 도움이 되며, 가지면 기분 좋아지는 물건이 너무나 많다.


아마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억만장자가 되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

이 중 더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은 후자이다.

그러나 한 번 소비의 늪에 빠졌는데, 포기라는 함정에까지 빠질 수는 없다.

당장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하루에 1미리씩만 몸을 빼내보기로 한다.

한 번 더 각오를 다져본다.

딱 필요한 정도로만 비장하게.




비움이 어렵다면 다른 것으로 채워넣으면 된다.

채움으로써 비워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나처럼)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절제 대신,

소비를 줄여 생긴 마음의 빈틈에 채워넣을 대체재를 찾는 것이 더 좋겠다.

본래 즐겨했던 독서라든지,

어느 순간부터 '소용'을 찾게 되면서 멀리하게 된 영화감상이라든지,

그도 아니면 무작정 걸으며 글에서마저 길을 잃은 지금을 찬찬히 되짚어 보든지.


그렇게 1미리씩 빠져나오다보면

언젠가는 마법구슬은 그 빛을 다하고 내 마음에 다시 빛이 켜지는 날이 오리라.


그렇게,

내 가진 것에 만족하며 다시금 여유부릴 수 있을 때가 오리라.


그렇게,

온전한 나의 하루를 살 수 있으리라.



부디!






언제나 그랬듯 답은 내 안에 있음에도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스스로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이 글의 진짜 제목은

"총체적 난국"

임을 밝히며-


끝!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남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