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 같은 논픽션 에세이 _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미국
해외에 판매한 슈퍼 컴퓨터 CRY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나는 미국에서 슈퍼 컴퓨터를 구매한 국가를 다니며, 해당 국가의 기관 몰래 슈퍼 컴퓨터에 기록된 정보를 빼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슈퍼 컴퓨터를 판매할 때부터 미국은 자국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설계, 제품에 반영하였고, 나는 데이터를 빼내 오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내가 맡은 임무의 위험성을 말해주는 사건을 앞에 일어난 일화에 썼다.
다른 나라의 정보를 빼오는 것이 당당하지 않은, 미국의 입장에서 나와 나의 팀을 요원으로 훈련을 시킨 것이다.
최근에 미국이 중국 통신장비 회사 화웨이에 대한 안보 위협 기업으로 지정한 적이 있다.
이 기사를 보는 순간 미국은 자국이 해외에서 했던 경험 때문에 중국 통신 장비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정치, 경제, 대 중국 관계 등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이 슈퍼 컴퓨터에서 수교국의 정보를 빼냈던 그 들의 활동 경험도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 미국 정부가 하는 행위들을 보면 내가 한 일에 대한 것들의 퍼즐들이 맞추어진다. 미국은 정보에 의해 움직이고, 운영되는 국가이다. 정보를 얻기 위한 그들의 데이터 수집, 분석, 가공 능력은 지금 데이터의 중요성을 외치는 현재 더욱 강력해졌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한국은 데이터 수집, 가공에 지금 중점이 있지만, 미국은 데이터를 정보로 활용하여,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한 경험을 이미 갖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정보 활용 및 예측 알고리즘을 보유하고, 발전시키고 있을 것이다.
데이터 주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떻게 슈퍼 컴퓨터에서 정보를 빼내는지에 대한 실전 모의실험을 통해 확실히 익히게 되었다.
1988년 우리는 일주일 동안 기기 사용과 함께 행동 지침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국가별 관습이나 민족적 특성에 관한 교육은 물론 드레스 코드와 식사 매너까지 일련의 교육과 실습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도 상황 별 대처 방법은 물론 그에 따른 행동 및 대화 방법까지도 배웠다. 모든 교육 과정은 철저히 매뉴얼이나 핸드북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필요한 내용을 생산하고 수정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은 매뉴얼 국가이다. 매뉴얼 대로만 하면 역할과 책임에 대해 대체로 자유롭다. 매뉴얼에 없는 경우 그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임기응변에 대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매뉴얼에 없는 행동에 따른 책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육 과정을 매뉴얼과 핸드북으로 숙지하고 훈련하여 몸에 익숙해지면 상황에 따라 조건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교육 내용들을 숙지하고 수없이 반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우리도 모르는 매뉴얼 맨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첫 훈련은 뉴욕 시 내에서 이루어졌다.
Handler와 Carrier로 구성된 2인 1조 팀은 페이저에 표시된 장소와 시간에 맞추어 해당 장소에 도착한 후 페이저로 도착했음을 알린다.
Cray-2 뒷면 슬롯에 외장하드를 넣은 후 페이저에 표시된 8자리 암호를 입력한다. 워크스테이션이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는데 워크스테이션이 없는 곳에서는 조그마한 별도의 가방에 연결하여 암호를 입력하였다.
물론 모의 훈련에는 일련의 모션으로 대신하였다. 외장하드 뒷면의 녹색 불빛이 들어오면 완료되었다는 표시였다. 완료되었음을 페이저로 알리면 Carrier에게는 외장하드를 전달할 장소와 시간 사람 이름이 전송되어 왔고 Handler에게는 다음 행선지와 함께 정해진 일자와 시간이 메시지로 전송되어 왔다. Carrier가 전달 완료 메시지를 보내면 다음에 만날 Handler와 함께 행선지가 전달되는 식이다. 함께 출발은 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다른 Handler와 Carrier를 만나 업무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또한 함께 있는 상황에서 발생 가능한 경우를 배제하는 수단이었다.
뉴욕 시에서 시작된 이 훈련은 미국 내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수없이 반복하였다.
한 도시를 국가로 가정하고 머무는 시간은 최대 30시간을 넘지 않도록 일정이 짜였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제 업무를 시작할 무렵에는 업무 완료 후 바로 미국으로 복귀하는 일정이 대부분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국가 간 이동 횟수가 늘어났다. 초기에 투입되었던 15명 전원을 Handler로 만들려고 하였던 계획은 나를 포함한 7명만이 Handler가 되었고 이후 만난 Carrier들은 모두 미국인들이었다. 6개월 이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대내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Carrier들은 우리가 전해준 외장하드를 가장 가까운 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의 외교행낭을 통해 미국으로 보내 지도록 움직였다.
훈련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던 1988년 4월의 어느 날 아파트 우편함에 이민국에서 발송한 노란색 서류 봉투가 있었다.
드디어 영주권이 도착하였다. 영주권을 꺼내 들었을 때의 감흥이 아직도 기억나는 것 같다. 그 종이가 뭐라고 그리도 많은 시간들을 마음을 졸이며 갈망하여 왔었는지 반가움과 씁쓸한 마음이 계속 교차하여 왔다. 지금은 미국 이민 신청 비율이 그때보다는 현저히 낮아진 상황이고 굳이 미국까지 가서 고생할 필요가 없을 만큼 대한민국이 발전하였지만 그 당시 불법체류 신분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한국인들의 숫자도 많았다. 당시 가장 용이하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병아리의 암수를 구분하는 감별사와 육계 가공 공장이었던 것 같다. 미국인이 기피하거나 하기 힘든 직종을 택하여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다. 한국 전통 여닫이 문의 창살만 만들 줄 알아도 목공 기술을 인정받아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근무를 시작한 지 6개월여 만에 영주권이 발급되었다는 놀라움과 교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 등 많은 감정들이 뒤섞이며 오랜 시간 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영주권은 나에게 성공의 열쇠를 받은 느낌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괜찮은 직장도 생겼고, 꽤 좋은 보수도 받게 되고, 영주권까지 받았으니, 다시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해결되는...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성취감을 맛보게 된 순간이었다. 그 이후의 삶은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때의 성취감을 기억해 본다. 그리고...
반복되는 모의 훈련과 기타 교육으로 조금은 긴장감이 떨어질 무렵 HR의 호출이 있었다.
호출 이틀 후 프랑스 출장 일정을 통보받았다. HR은 Handler, 내가 Carrier인 팀이 구성되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완벽함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소풍 가기 전날의 심정이랄까 나는 새로이 지급된 페이저를 꺼내어 슬라이드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면서 작동 여부를 여러 번에 걸쳐 확인하였고 건전지도 새것으로 바꾸는 등 들뜬 내 마음을 제외하고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HR과 만나기로 한 JFK공항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뉴욕을 출발하여 프랑스 파리로 향하던 중 HR은 이번 출장 일정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첫 번째 일정은 모의 훈련과 같이 나의 본래 업무를 소화하는 것이고 그다음 일정은 메시지가 전하는 대로 따르라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국립우주연구소에 슈퍼컴퓨터가 있는 것으로 전달받았다. 파리 드골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 로비로 나오자 HR을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나와는 간단한 악수만 교환한 후 HR과 따로 대화를 나누었다. 표정으로 보아 조금은 심각한 듯 두 사람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마중 나온 사람과 헤어진 HR과 나는 택시를 이용하여 프랑스 국립우주연구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