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 같은 논픽션 에세이 _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미국
1996년 6월 23일 당시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의 사우디아리비아 방문을 수행 중이던 H와 나와 함께 걸프전 준비를 함께한 쿠웨이트 친구는 사우디아라비아 동쪽 ’ 코바’ 시에 이란과 이라크 견제를 위해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이 숙소로 사용 중인 건물들 중 하나인 ‘코바빌딩’에 있었다.
국방장관의 숙소 방문일정 전 사전 점검을 위함이었다.
인근 ‘다란’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회사인 아람코 본사는 물론 압둘국왕 공군기지도 있는 주요 지역들 중 하나였고 1995년 겨울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인 리야드에서 발생했었던 차량 폭탄 테러로 인해 숙소 사용에 대해 대외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부정할 만큼 철저한 보안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장소였다.
1차 점검을 마친 H는 24일 국방장관과 합류한 후 마지막 점검을 위해 25일 오전 다시 숙소를 방문하였다. 사람의 운명이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그랬었는지 그날 해리는 그 숙소에서 오래전 함께 근무했었던 동료를 만나 끝내 그 숙소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다이너마이트 9톤 위력의 플라스틱 사제 시한폭탄을 싫은 트럭이 숙소 단지 정문에서 출입을 거부당하자 테러리스트들은 숙소 건물과 가장 가깝게 위치한 주차장에 트럭을 주차하였다. 폭발을 위해 사전 준비를 하고 있던 모습을 수상히 여긴 보안요원에 발각되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대피하였지만 H와 내 친구는 미처 피하지 못할 상황이었던 것 같다.
▲1996년 6월 25일 = 동부 코바르의 미군 숙소에 폭탄 실은 연료운반차량 돌진으로 미군 19명 사망, 400명 부상 (서울=연합뉴스)
현지 시간 자정 무렵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바레인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폭탄은 폭발하였고 나는 그 소식을 뉴욕에 있는 친구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H와 친구가 그곳에 있었고 현재 생사를 파악 중이라고 하였다.
그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점심을 먹고 있었고 나는 바로 사무실로 돌아가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인 인공위성의 위치이동을 허가 없이 감행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코바시에 고정였다. 한밤중인 현지 시간 때문에 명확한 이미지는 볼 수 없었지만 화재로 인한 환하게 이글거리는 불꽃은 볼 수 있었다. 나는 H와 친구의 생사확인을 위해 랭글리와 뉴욕, 펜타곤등 연락할 수 있는 모든 곳을 동원한 후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답답하고도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27일 쿠웨이트 친구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친구의 것으로 추정되는 몇 조각의 물건과 추 후 밝혀진 신체 일부로 최종 사망확인이 되었다. H는 처음엔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라도 발견되기를 소망하였고 그 시간이 지나가면서는 H와 관계된 그 어떤 것이라도 발견되기를 희망하였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아 결국 출입자 명단과 전해복구 기간을 거친 후에야 생사확인을 거쳐 최종 사망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H는 사랑하는 가족과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너무나도 자신의 모습을 닮은 아들인 M이 일곱 살 때였다.
장례식 참석을 위해 보스턴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었다.
교수님을 만나 정보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곳이 보스턴이었고 교육과 훈련을 위해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이 H였다. 그 H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어쩌면 시작과 끝이 예정된 시나리오처럼 나의 삶의 일부분을 정리하러 가는 느낌이었다. 장례식이 열리는 교회에 도착하여 H에게 교육과 훈련을 받고 끝까지 활동을 하고 있던 죽음을 맞이한 쿠웨이트 친구를 제외하고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친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반가움의 미소를 주고받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멕시코에서 술집을 운영하고 있던 독일 출신 친구도 참석하여 그 분위기는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미국의 장례식은 곱게 화장하고 평소 활동할 때와 같이 좋은 옷을 입은 망자가 누워있는 관을 열어 참석자 모두가 그 모습을 보며 작별을 고하는 것인데 H와 관련된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H의 사진과 함께 일기장을 펼쳐 놓은 것으로 대신하였다. 우리는 차례로 H의 사진으로 작별 인사를 한 후 유족인 J와 아들 M에게 인사하기 위해 그들 앞으로 갔다. 무슨 상황인지 그토록 다정다감했던 아빠를 다시는 볼 수 없는 이 상황을 모르는지 나를 본 마이클은 내게 달려와 안기며 언제 다시 디즈니랜드에 갈 수 있냐고 물었다. 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 그날의 그런 개떡 같은 상황을 만들었는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H를 묘지에 묻고 H 부모님 댁에 들려 H를 추모하면서 남은 여섯 명의 친구들과 한 가지 약속을 하였다.
M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우리가 책임진다. 우리들은 그다음 달부터 일정 금액을 저축하기 시작하였고 J의 반대에도 불고하고 15년 동안 우리들은 약속을 지켰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풋내기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켜 나름 필요한 존재들로 만들어 준 대가 치고는 약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고 생각해 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비록 나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M의 대학교 졸업식에 세명의 친구들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자기 아빠보다 더 큰 체격으로 멋지게 성장해 준 M이 고맙고 그런 M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준 J에게 감사한다.
장례식을 마친 나는 로스앤젤레스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 뉴욕을 거쳐 펜타곤을 방문하였다.
작년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겪은 폭탄 테러와 같은 방법으로 어쩌면 미국에서 나의 가족과도 같았던 H를 잃은 것에 내가 속한 조직과 그 목적들과 지향하는 것들에 대한 회의와 증오심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