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원 Mar 03. 2024

1980년대 부산으로 떠나다.

1980년대 부산으로 떠나다

80년대 부산으로 떠나다 - III

2009년 가을 나는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아니 도피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말은 결과를 설정하지 않은 과정만을 얘기한 미사여구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를 얻지 못한 나에게는 "떠나라"는 말은 도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돌이켜 보면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도 도망치듯 도피하듯 가방하나 둘러매고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 노량진 고시원에 월 3만 원에 등록하고 숙식을 해결하며, 치열하게 생존하기 위해 살았었다. 나름 열심히, 나름 최선을 다하며 주어진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묵묵히 때론 버거웠지만, 인정받고 결과에 만족하며 서울 살이를 이어왔다. 누구나 있을 법한 삶의 굴곡도 있었고, 내 고집으로 사업의 실패도 맛보았지만, 그래도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회사를 다니는 기회도 얻었다. 나에게 회사, 조직, 주어진 일들이 참 어려웠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창업을 하고 실패했던 경험과 나의 성향 때문일 수도 있다. 가방하나 둘러메고 서울로 상경한 청년이 중년이 되기까지 걸어온 길은 치열했다. 그 치열함에도 나를 잃지 않고 살아왔는 데, 회사를 이직한 이후 조직 속에서 나를 잃어가는 느낌이 큰 아픔이 되었다.


나는 여행 계획도 없이 도피처로 선택한 곳이 내 기억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기억이 그려지는 지점에서부터 다시 나를 바라보고 싶어졌다. 그때의 나를 바라보며, 지금 나에게 또는 그때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선택 곳이 1980년대 부산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2009년 나는 서울역 매표소에서 1980년의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샀다.


지금 부산을 가 봐도 별것이 없건만... 근데 왜?...

어쩌면 그곳에 가면 어릴 적 내 모습을 더듬어 가다 보면 다락방 한 구석 보물처럼 숨겨 두었던 딱지 상자를 꺼내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당시 딱지 상자는 행복이었고, 자부심이었고, 꿈이었다. 그래 어쩌면 어릴 적 내 모습에서 잊고 있던 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나는 1980년대 부산에 살고 있는 나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밤늦게까지 뛰어놀던 그곳은 그대로일까? 아니 그대로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길 떠난 친구가 고향을 가면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친구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처럼, 20년 이상 흘러버린 시간에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으면 하는 희망 섞인 불안함을 앉고 1980년대 부산으로 향했다.

이미 알고 있다. 한국 사회는 80년대를 거치면서 성장과 개발로 도시는 그 옛날을 간직하지 않으려 했다. 도시는 역사를 잊고 현재만을 품으며 제 몸 값만 높이는 데 혈안 되어, 의미 있는 옛 것을 보존하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1980년대 부산은 그 흔적이 희미할 거라는 사실을...

동의공전 길 : 2008년 사진


내가 태어나서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생활했던 곳은 전포동이었다.

부산에 도착하여 숙소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간 곳은 전포동이었다. 내 삶의 시간 순서에 따라 더듬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부산의 급격한 발전으로 기억 속의 그것들이 사라졌을 것 같은 불안감을 앉고 전포동으로 향했다. 나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었다. 나의 유년시절을 보낸 동네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이 되었지만, 덕분에(?)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 같은 동네에 내가 마지막으로 발을 딛고 흔적을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다음에 오게 된다면 이곳은 아파트 숲이 되어 나의 1980년대 부산은 사라진 도시에 추억만 남을 듯하다.


사라지기 시작한 도시를 기록하듯 그리고 내 기억을 더듬으며 동네 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동의 공전 <지금은 동의과학대학으로 바뀌었더군>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아래 사진) 끝집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 집은 사라지고 도로로 편입되어 버렸다. 부산은 무섭게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시 전체가 아파트 단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저 많은 아파트에 누가 다 살까? 부모님이 결혼 후 두 번째로 이사 와서 나를 낳았던 집은 이제 도로에 묻혀버림을 확인하고 씁쓸히 돌아섰다.

동의공전으로 올라가는 길

내가 태어난 이후 첫 번째 이사를 하기 위해 내려온 좁은 골목길...


산 아래 전셋집에서 살다 부모님이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 산 동네에서 조금 아래 동네로 이사하던 그날...

온 가족이 모두 이삿짐을 하나씩 짊어지고 종일 짐을 운반했던 기억.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연신 웃고 계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어디선가 빌린 리어카에 짐을 싣고 끌었고, 어머니와 누나들은 리어카를 밀었다. 나에게 그날이 마치 놀이 같았다. 평소 할 수 없었던 것을 해 보는 날... 집안의 모든 짐을 모조리 밖으로 꺼내고, 그것을 다시 다른 집으로 옮기는 소꿉놀이 같은 날이었다.


그런데 5살이 채 안된 난 나보다 키가 크고 무거운 책꽂이를 들고 저기 골목길을 내려오면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 사진 속 골목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이마를 땅에 부딪친 후 경사진 골목길에서 굴렀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어린 녀석의 고집이 만들어낸 이삿날의 비극.


그날의 흔적이 지금도 내 이마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사고가 터진 이후 상황의 내 기억은 희미하다. 분명하게 그려진 모습은 이사하다 말고 아버지는 나를 업고 뛰고 어머니는 울고... 이삿날이 난리북새통으로 변했다는 사실. 난 병원에서 10 바늘 가까이 이마를 꿰맨 기억이 난다. 이사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날의 일로 내 이마에는 훈장 같은 흉터가 우리 가족의 내 집 마련의 꿈과 함께 기록되었다.


돌이켜 보면 어릴 적 나는 고집이 세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좋게 말하면 자기주장이 강한 주도적인 아이였고, 나쁘게 말하면 타협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그리고 호기심과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은 아이였다.


5살짜리 나를 바라보면서 지금의 내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어쩌면 난 세상과 타협할 줄 몰라서 이 길을 나섰는 지도 모른다. 찢어진 마음의 상처를 꿰매 줄 의사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퇴사 같은 휴직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