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원 Mar 17. 2024

행복한 기억이 가장 많았던 집

1980년대 부산으로 떠나다.

추억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잃어버린 또는 잊어버린 행복했던 기억과 경험을 다시 몸속으로 소환하기 위한 노력 일 것이다. 미래를 위해 오로지 현재를 보낸다는 것은 힘겨운 삶이다.


1980년대 초에는 한 집에 여러 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다. MBC의 한 지붕 세 가족은 당시의 모습을 잘 그려놓은 일요일 아침드라마였다.


당시 우리 집도 한 지붕 세 가족이었다.

한 지붕 세 가족이 살면서 주인집이 갖는 특권을 우리는 누렸다. 우리 가족은 마당 평수가 넓은 쪽에 살았다. 마당 평수가 넓은 쪽에는 장독을 많이 놓을 수 있었고, 큰 물탱크를 갖고 있었다. 물탱크는 공용이었지만, 다른 두 가족은 거리가 좀 있어 미리미리 물을 받아서 부엌에 담아 두었다. 큰 물탱크가 1년에 한 번 물을 빼고 청소를 할 때 그날은 우리 집 물탱크가 어린 나에게 수영장이 되어 주었다. 물탱크를 씻기 전에 나는 그곳에서 동생과 수영장 물놀이를 즐겼다.


우리 집의  두 가구 집 구조는 똑같이 방 2개 다락 1개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독립된 한 채는 방 하나에 부엌 하나로 되었는데 이곳에는 담배포가 있어서 어머님이 담배를 팔았던 기억이 난다. 담배포에서 나도 담배를 팔았던 기억이 있는 데 아마도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담배포를 지켰던 것 같다. 기억 속에 있는 담배는 바람개비 모양의 환희인지 아리랑인지 가물가물 초록색 포장의 박하, 청자가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담배포를 인근 쌀가게에 넘기고, 이 방도 세를 주셨다. 방 하나, 부엌하나 지금의 원룸 같았다.


폐허가된 나의 옛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린 시절에는 몰랐던 나의 아버지는 열심히 회사 다니시는 동안 나의 어머니는 나름 억척스럽게 사신 듯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을 돌아보면 꿈을 꾸는 삶이 아닌 생존하고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삶을 살아오신 듯하다. 꿈보다는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가야만 했던 70~80년대 부모님들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 듯하다.


난 G.O.D의 어머니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노랫말에는 "어머니는 짜장면을 좋아하셨서.."라는 부분에서 나는 지금도 가끔 울컥한다. 그 옛날 어머니는 짜장면이 드시고 싶었고, 집에 있는 나를 데리고 동네 중국 집에서 짜장면을 함께 먹었다. 기억에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 450원이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가 500원 지폐 두장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계산하라는 기억 때문이다. 나는 그때 어머니와 단 둘이 먹었던 짜장면을 잊지 못한다. 세상에서 내가 먹었던 가장 맛있던 짜장면... 훗날 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후 한 동안 짜장면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로 G.O.D의 노랫말 속의 몇몇 장면들은 나와 어머니를 소환하였다.

우리 집 대문

사진 속 더불 X로 표시된 것이 우리 집 대문이다. 우리 집 대문은 작은 쪽문으로 어른들이 들어올 때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했다. 그리고 대문 밖 길보다 마당이 낮아서 계단 3개를 딛고 내려와야 했다. 골목에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다가 잠시 쉬기 위해 우리 집 대문 앞 문 턱에 앉아 놀다가 작은 문쪽으로 뒤로 넘어지면 우리 집 마당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쪽 대문을 잠그셨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아이들이 우리 집 문턱에 앉지 못하게 화를 내시곤 하셨다. 어머니가 걱정하는 것은 아이들이 마당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다칠 것을 우려해서였다. 정말 아찔한 경우도 몇 번을 봤다.

어머니가 동네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또 다른 경우는 야간 근무 후 퇴근하신 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실 때였다. 아버지는 1주일 야간, 1주일 주간의 2교대 근무를 30년 넘게 하셨다. 동네 아이들이 정말 말을 듣지 않을 때 어머니는 가끔 바가지에 물을 담아 문 밖으로 나가셨다. 아이들이 도망가면 그때 물을 뿌리시곤 하셨다.

우리 집의 작은 방

폐허가 된 우리 집을 지나가지 못하고 나는 이곳에 머물러 계속 우리 집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문이 잠겨 대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담장 밖에서 집안을 보았을 때 보인 방이 하나 있었다. 이 방이 작은방으로 여자 자매가 많은 우리 집의 특성상 어릴 때는 이곳에서 누나와 동생 방이었다. 그리고 난 큰 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방을 썼다. 그리고 좀 커서는 큰 방을 누나 동생이 사용하고 난 다락방으로 옮겼고 부모님이 작은 방을 쓰셨다. 다락방은 작은 방 안에 있었고, 다락방 아래는 부엌이었다. 다락방에는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한 단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담금 술 단지이다. 어머니는 계절별로 담금 술을 만드셨다. 인삼주, 과일 주 등등으로.... 손님이 오시거나, 아버지가 집에서 쉬는 날이면 나는 은색 주전자에 담금 주를  담아서 다락방에서 내려오곤 했다. 가끔은 담금 주의 맛이 궁금하여 한 모금씩 마셨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다락방에 혼자 있을 때 과일주가 마실 만하여 몇 모금 마시고 뻗어 잤던 적도 있다. 깬 후 속이 너무 아파 이후로 잘 마시지 않았다.


우리 집 내부 모습

이쪽 담장에서 저쪽 담장으로 옮겨 가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살던 때와는 조금 집이 변해있었다. 오른쪽에 시멘트로 된 곳도 원래는 왼쪽처럼 마루였고 마루 가운데 뻥 뚫린 부분은 막혀있었다. 한 지붕 두 가족이 공존했던 구조였다. 아마도 우리가 이 집에서 이사한 이후 어떤 주인이 집 전체를 하나의 주거 공간으로 활용했던 것 같다. 그 당시 그렇게 크게만 느껴졌던 집이 담장 너머로 보니 참 작아 보였다. 마치 국민학교 2학년 때 6학년 책걸상이 그렇게 크게 보였는 데, 고등학생이 되어 6학년 책걸상을 보며 느꼈던 그런 느낌이 스쳤다.


마당에서 난 아버지와 축구를 했고, 큰 평상을 마당에 놓고 여름이면 찬물에 밥 말아서 옆집 분들과 함께 밥도 먹고, TV도 보고 했었다. 마당 한편에는 화단도 있었고 내가 하굣길에 사 온 병아리를 키웠던 닭장도 있었다. 지금은 그 공간들이 보이지 않고 내 기억 속에서 상영될 뿐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우리 집을 보면서 나의 삶의 한구석도 이렇게 사라져 가는구나 하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다음번에 올 때는 이곳은 아마도 또 어떤 건물 혹은 큰길로 바뀌어 있으리라...

사라져 가는 그 시절의 도시에 고향을 찾은 이방인 추억을 담고 있다.



과거는 나의 미소가 되고, 미래는 나를 움직이게 하고, 현재는... 행복해야 한다.



여동생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이곳에서의 생활이라고 한다. 아마도 온전희 가족이 일상의 행복을 누렸던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서 이사를 하면서 세상의 힘듦을 부모님이 겪으며, 보통의 우리 가족에게도 어려움이라는 것을 겪었다.

이전 03화 1980년대 부산 골목 풍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