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부산으로 떠나다
1980년대 부산으로 떠나다
2009년 여행을 돌이켜 보면 80년대 부산으로 떠나는 여정은 나를 이해하고,
나를 둘러싼 환경 조망을 통해 현재의 나를 알고 싶은 욕구에서 시작된 듯하다.
태어나고, 성장한 환경과 당시의 모습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을 것이 생각했던 것 같다.
5살짜리 꼬마의 무모한 고집으로 새겨진 훈장 같은 흉터가 우리 가족의 내 집 마련의 꿈과 함께 기록된 날! 그렇게 우리 가족의 이사는 마쳤고, 우리 집이 생긴 날이었다.
이사한 집이 있는 곳은 사진 속 11-35 집을 기준으로 아랫동네와 윗동네가 나누어지는 기점이 되었다. 정확히 이 집에 누가 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아기를 업고 다니던 젊은 아줌마가 한때 살았던 집으로만 기억한다. 그분이 이 집에 살았는지? 아니면 이 집에 자주 마실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에는 동네 아주머니들끼리 왕래가 잦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도 오전에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잠시 동네 다른 집에 가시곤 했다.
사진 속 11-35 집은 아랫동네에 속하며 동네 삼거리 위치해 있었다. 청소차가 오면 삼거리에서 차를 돌려 내려갔다. 운전면허의 T자 시험을 보는 것과 같은 골목이었다. 청소차가 큰 도로에서 동네로 들어오면서 종을 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집에 있는 쓰레기통을 짊어지고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청소차 뒤에 줄을 서서 청소차 아저씨에게 쓰레기통을 번쩍 들어 올려 건네주었다.
나는 국민학교(요즘은 초등학교지) 5학년 때부터 가끔 쓰레기통을 청소차에 버리기 위해 뛰었다. 가끔 연탄재가 든 쓰레기통을 들고뛸 때는 정말 무거웠다. 우리 집에 아들이 나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가끔씩 담당을 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쓰레기 통을 조금 늦게 들고 나가면 청소차가 바로 다른 동네로 가버리기에... 종소리만 들리면 어머니의 고함소리와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뛰어 나갔다. 다행히 아버지가 야간 근무를 하고 아침에 들어오시는 날에는 아버지가 담당해 주셨다. 청소차가 오는 날 아침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오는 진 풍경이 연출되고, 사람들끼리 인사하고 출근을 위해 또 뛰어서 집으로 향하는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왼쪽 흰 벽에 창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이 집을 지나면 오른쪽이 나의 유년 시절을 보냈던 우리 집이 위치해 있다. 우리 가족은 정확히는 내가 5살부터 6학년까지 이곳에 살았다. 오른쪽 붉은 벽돌집들은 그 사이 증개축을 한 듯한데 왼쪽 이 집만은 그대로이다. 하기여 내가 이 동네를 방문한 것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변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왼쪽 흰 벽의 창문이 있는 집에는 나보다 몇 살 위의 형이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 형과 함께 많이 놀았던 기억. 이 집을 지나 내려가려는 순간 2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직도 누군가가 이곳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라는 설렘이 있었지만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왼쪽 흰 벽이 있던 집 옆에는 골목이 있었고, 내가 국민학교 다닐 적에 그 골목 끝집에는 동창이 살았었다. 그와 나와는 2~3학년을 같이 다녔던 기억이 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데, 어느 날부터 나를 괴롭히면서 힘든 시간을 잠시 보냈다. 주먹다짐을 할 수 있었지만, 당시 나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친구 어머님이 우리 국민학교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내가 싸움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선생님의 아들을 건드리는 일은 안된다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내가 왜 당시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생각으로 난 그와 친하게 지내다가, 그의 행동이 나를 힘들게 하면서 나는 그를 피해 다녔다. 생각하면 친구는 장난이었고, 악의가 없었지만, 나는 그의 어머니가 선생님이기에 친구를 편하게 대할 수 없었던 듯하다. 내 성격 탓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2009년 현재 이곳은 재개발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고 모두 이주한 듯하다.
내가 만약 이번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영영 보지 못할 소중한 장면들이다. 혼자 이곳을 거닐며 사진을 찍으며 옛 기억을 더듬어 보는 기분이 애잔했다. 텅 빈 공간에 그 옛날의 사람들이 정말 영화 속 장면처럼 오버랩되면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나를 휘감고 있었다.
아파트와 빌라 속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우리 집 아니 나의 옛집.... 15-34
난 이곳에서 5살부터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살았다. 이 집에는 우리 가족이 외에도 두 가족이 함께 살았는데 우리 집은 주인집이고 두 가족은 세 들어 살았다. 한 지붕 세 가족이었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은 이 집을 전세를 앉고 구입을 하고 계속 대출을 갚아 나가셨던 모양이다. 이 집에서 함께 했던 가족들 중 기억에 남아 있는 가족은 때밀이 아저씨네와 동갑내기 친구 가족, 그리고 딸 부잣집 가족이었다.
때밀이 아저씨네는 나중에 중국 집을 개업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때밀이 아저씨가 우리 집에 함께 살 때 동네 목욕탕에 가면 아저씨가 공짜로 때를 밀어주셨는 데, 난 몇 번 가다가 가지 않았다. 아저씨께 내 몸을 맡기면 너무 아팠던 기억 때문...
나와 동갑내기 친구는 함께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그가 5학년때 이사를 하면서 전학을 갔다.
그 친구는 함께 국민학교를 다녔는 데, 언제나 그 친구와 내가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이 난 무척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공부도 운동도 참 잘했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로 국민학교 운동회때 친구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회사는 다른 데, 그 때가 야근을 하고 함께 낮에 집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두 분은 서로 집에 있을 거라 믿고, 따로 우리 운동회에 오셨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마주치시고, 서로 황당한 모습과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우리 아버지들은 1주일 주간, 1주일 야간의 12시간 가까이 근무를 하셨다.
딸 부잣집 가족의 슬픈 사연과 나와 동갑의 장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딸만 넷이었던 가족으로 아저씨는 선원이셨다. 우리 집에서 다섯째가 태어났는 데, 다섯째가 딸이면 입양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다섯째가 태어난 후 딸 부잣집 아저씨와 아줌마는 참 많이 싸우셨다. 다섯째의 입양 문제로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딸은 입양 보내지 않고, 우리 집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간 후 막내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딸 부잣집 장녀는 당시 그의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을 참 잘 보살폈다.
때밀이 아저씨는 중국집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고, 자녀분들을 잘 키웠겠지? 참 억척스럽고 유쾌하셨던 분이라는 기억, 지금은 그 아저씨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그의 느낌만 느껴질 뿐이다. 동갑내기 친구와 딸부잣집 장녀는 지금 그들은 어디선가 나름 열심히 살고 있겠지?
나처럼 이곳을 한 번은 다녀갔을 까? 지금 그들을 만난다면.... ㅎㅎㅎ
갑자기 피천득님의 수필이 생각났다.
아사코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작가의 느낌처럼, 어쩌면 이 집에서 함께 했던 그들도 내 기억 속에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린 각 자의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그리고 각 자의 모습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지금 내가 힘겨워하는 것도 어쩌면 지금이기에 그럴 수 있다.
지금이라는 괴물에 나를 잃지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