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 같은 논픽션 에세이 _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미국
1989년 어느 날...
아침부터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점심이 지나자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HR의 호출로 사무실로 갔다.
HR의 호출은 분명 또 다른 보고서 업무가 주어질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 얼굴에 그려졌던 모양이다. HR은 웃으며 “Just talk”라고 하였다. HR과 함께 한지 거의 2년이 돼가는 내게 본인의 방으로 불러 단순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제안에 내 머리는 슈퍼 컴퓨터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HR은 상대를 설득하거나 본인의 의도대로 끌고 오려고 할 때 사용하는 대화의 방법이 있었다.
본인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강력한 것부터 던지고 상대가 본인의 제안을 수락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그 이후에 수반되는 일련의 조건들을 설명하는 식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HR은 내게 내민 것은 파란색 표지에 금빛 독수리가 인쇄된 미국 여권이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HR을 쳐다보았고 HR은 열어 보라고 하였다. 그 여권을 열어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사진과 이름 생년월일이 일치하는 미국 여권이었다.
영주권을 받은 지 거의 1년이 돼가는 시기에 미국 여권이란 것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고 일종의 불법적인 일이다. 필요시 사용하는 공무 여권도 일종의 편법인 지라 아마도 어디론가 출장을 가야 함에 대한민국 여권으로 불가능하거나 임시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정도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어디로 무엇 때문인 지가 가장 궁금한 일이었고 한편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HR에게 이 임시로 발급된 가짜 여권을 가지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었다.
HR은 “이거 진짜 네 여권이야"라고 말하며 오히려 놀라지 않은 내 반응을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만일 이 여권이 정식으로 발급된 내 여권이라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의무감이나 역할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나라의 여권을 소지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 미국은 시민이라 칭하니, 시민권자가 된다는 것인데 사실 나는 영주권만으로 충분하였고 Handler로 승급된 이후엔 내 업무의 양과 깊이가 틀렸던 것을 경험한 이상 시민권자가 된다는 것을 반길 수 없었다.
‘NO Pain, NO Gain’의 원칙을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이 경험한 탓이었다.
나는 HR에게 “훌륭한 미끼예요"라고 말하면서 “내가 어떤 요리가 되어야 해요?”라고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이 여권을 손에 쥔 순간부터 미국을 위해 어떤 모습의 내가 되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손에 쥐고 본인들이 원하는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전략이 너무 보이는 것 같아서 뱉은 내 나름 대로의 유연한 항변이었다. “그래서 난 네가 마음에 들어"라는 HR의 답을 듣고 나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게임에 졌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솔직히 시민권이란 권리는 싫었다. 힘들고 바쁜 삶의 연속이었지만 견문과 지식이 넓어지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름 만족하고 있었고 익숙해져 가는 일상에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싶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