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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훈 Jun 07. 2020

모든 건 질투에서 시작되었다!

질투와 행복의 함수관계

그간 어떤 인물과 관련해 정치사회적 이슈가 돼 온 사건들을 살펴보면, 그 배경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질투’라는 요인이 한 편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일 수도 있으며 절대적 요인도 아닐 수 있지만, 부분적으로라도 일정하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질투야말로 ‘남을 인정하는 가장 정직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성악설(性惡說)의 원조 격 스토리라 할 수 있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사건인 카인과 아벨의 사건도 바로 이 단순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하느님이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똑같이 받으셨다면? 결코 형제간 살인이란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것만 받으셨다. 성서에는 카인이 수확한 곡식을 바쳤다고만 나와 있지, 형편없는 곡식을 올렸다고 쓰여 있지 않다. 땀 흘려 농사지은 곡식을 바쳤는데, 신은 동생 아벨의 제물(양)만 이뻐 받아주셨으니 그 섭섭함과 질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나는 질투한다, 고로 존재한다


제임스 딘을 스타 반열에 오르게 했던 영화 <에덴의 동쪽>의 주제도 그렇고, 수많은 신화의 단골 주제가 질투였다. 형제간 왕위 싸움을 둘러싼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실제 역사들 또한 질투와 시기가 크게 한몫했다.


“나폴레옹은 시저를 부러워했다. 시저는 알렉산더를 부러워했고, 알렉산더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The Conquest of Happiness)』에 남긴 말이다. 세상을 다 가졌던 그들조차 이렇게 시샘하는데 우리 같은 범부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모두 ‘카인의 후예’가 아니던가?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반지하방에서 2층으로만 이사 가도 행복하고, 월셋집을 전전하다 전셋집 빌라로 이사 가면 내내 행복할 것 같지만, 그 흐뭇한 감정은 잠시뿐이다. 조금만 지나면 길 건너 아파트를 보며 ‘우린 언제 저기로 이사 가나’ 부러워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다시 절치부심, 오랜 기간 아껴 쓰고 저축하며 ‘노오력’해 25평짜리 아파트를 겨우 장만해도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더 큰 평수인 32이나 45평 아파트를 쳐다보게 마련. 이럴진대 갑자기 옆 동네 아파트 가격이 수억 뛰었다면 그 마음이 어떨 건가?


CJE&M에서 인용

오매불망 고대하던, 대한민국 모든 중산층의 로망이라는 강남사람이 된 김씨는 그랜저를 몰고 다녀도 행복하지 않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자가용들이 모두 벤츠니 BMW, 아우디 같은 고급 외제차 일색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모는 그랜저가 초라해 보인다.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끄는 출연자들은, 질투감 유발하는 -잘생기거나 똑똑해 보이는 이들보다, 그다지 핸섬하지도 않고 약간 어리숙해 보이는 예능인들이 대부분이다.  


질투 증폭시키는 행복의 주적은 ‘불평등’


2020년 지금이 행복한가, 아님 ‘응답하라 1988’ 시대가 행복했었나 사람들에게 질문해 보면 두 시대를 경험했던 이들 대부분은 후자가 행복했다 답한다. 왜 그런가 질문을 이어보면 여러 가지 답이 나오지만, 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 대부분이 ‘비슷하게 못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때는 질투할 일이 별로 없었더랬다. 그래서 삶은 풍족하지 못해도 행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눈꼴 시린 것들이 너무 많다. 너무 비교할 것이 많고, 너무 질투할 게 많다.     


네가 가지면 나도 가져야 한다. 우리 자신이 부유한지 가난한지 느끼는 것은 우리의 이웃과 친족, 친구, 직장동료가 얼마를 소유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여기서 소유는 ‘사회적 지위’까지 포함한다). 문제는 이 비교방향이 위로 향하지 절대 아래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과거와 비교하는 ‘절대 비교’는 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 ‘상대적 비교’만이 중요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지구촌 공통의 ‘보편적 진실’이다.


다시 돌아와 하느님이 카인과 아벨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비극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 ‘불평등’이야말로 ‘질투’를 뛰어넘어 ‘분노’와 ‘증오’의 수준으로 증폭시키는, ‘행복의 주적’이다.


북유럽 행복의 열쇠: 얀테의 법칙과 라곰


일반적으로 북유럽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로 완벽한 사회복지(안전망) 시스템 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열쇠는, 바로 북유럽인들의 ‘평등과 겸손의 십계명’으로 일컬어지는 <얀테(Jante)의 법칙>과 <라곰(Lagom)>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 2위(2020 세계행복보고서)로 뽑힌 덴마크 오르후스 풍경. 사진 Pixabay.com


<얀테의 법칙>

-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 남들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 남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

- 넌 남보다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 내가 무엇이든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라

- 누가 너에게 신경 쓴다고 생각하지 말라

-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들지 말라


위 내용은 <덴마크 사람들처럼>(밀레네 뤼달 지음, 마일스톤 펴냄, 2015년 출간) 중에서 인용한 것이다. 아, 이 얀테의 법칙도 ‘인디언 추장의 편지’처럼 여러 버전이 있다.


<얀테의 법칙>은 덴마크 사람들의 행동지침 격 문화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믿거나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잘난 척하지 말라(겸손하라!)'로 줄일 수 있다.  


<라곰>은 얀테의 사촌으로 스웨덴 사람들의 삶의 지침이다. ‘적당히’,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과 같은 개념이다. 이들은 왜 이런 태도를 삶의 미덕으로 삼고 있을까? 잘난 척 좀하면 어때서?


일반 국민들에 비해 ‘튀지 않기 위해’ 이들 나라 국회의원들은 수트보다 청바지나 캐주얼한 복장을 즐겨 입는다. 특권도 별로 없다. 부자들도 가능한 티를 내지 않는다. 집이든 자동차든. 입헌군주국인 이 나라 왕들도 그렇다. 질투가 얼마나 위험 한 지, 이웃들의 행복을 저해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교육 또한 일등이 되는 걸 가르치지 않는다. 일등을 위한 경쟁 대신 평등과 협동을 가르친다. 바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다.   


얀테와 라곰 문화에 내포돼 있는 합리적 핵심은 ‘평등’과 ‘공정’이다. 여기서 핵심은 평등이다. 공정은 평등을 위한 수단이다. 북유럽국가들은 공정한 세금을 통한 평등한 부의 분배로 복지 국가를 일궈냈다.    


바이킹과 탐라국이 질투를 잘 다스린 까닭은?


이보다 앞선 역사지리적 배경은 ‘바이킹’이다. 북유럽지역은 제주(耽羅)와 비슷한 점이 많다. 바다 건너 해적질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엄혹한 기후 환경과 척박한 토지가 그렇다. 먹고살 거리가 충분하지 못했다. 제주는 삼다의 섬뿐만 아니라 삼재(三災: 비와 바람과 가뭄)의 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지역 다 공동체 의식이 유달리 강했다.      


바이킹이 어느 지역을 점령했을 때 점령당한 지역의 영주가 “당신들의 왕을 만나고 싶다”했다. 바이킹들은 서로 쳐다보며 크게 웃었단다. “네가 왕이라 해라”하며. 평등한 공동체 안에서 리더는 있을지 몰라도 군림하는 왕이 있을 수 없다. 군림하는 순간(잘난 체하는 순간)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고 공동체가 붕괴된다는 걸 잘 아는 그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투가 끝난 후 벌꿀주 ‘미드’를 공평하게 나누어 마신다.   


pixabay.com


탐라국 또한 왕을 세우지 않고 고·양·부씨 세 부족장들이 돌아가며 대표 역할을 했다. 도둑·거지·대문이 없는 '삼무(三無)의 섬'이었던 탐라, 해방정국까지만 해도 민간 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제주였다. 지금은 삼무가 무색하게 강력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고, 수눌음이라는 공동체정신이 무색하게 시기와 무고, 송사가 난무하고 있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고립돼 있는 곳일수록 공동체가 살아있는 반면 질투 가능성도 상존한다. 나눌 파이는 한정돼 있는데 그것을 특정한 사람이나 세력이 독식한다면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질투를 유발시키는 행위는 금지된다.


죄 없는 질투, 죄 많은 인간


다시 돌아와 묻는다. 질투가 이렇게 무서운 괴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질투하는 이들을 향해 종종 이런 비난과 조롱의 화살이 쏟아진다. ‘능력도 없는 게, 시기 질투나 한다’‘자신이 (가지지) 못하니 배 아파서 그런다’는 식의.


허나 앞서 살려본 대로 질투는 인간의 본성이므로, 질투하는 이는 아무런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질투를 유발시킨 자들에게 있을 뿐(이걸 깨닫는데 난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남들의 시기 질투로 상처를 받았다면, 그들에게 섭섭해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내탓이요’ 하시라. 그 원인제공 당사자는 바로 자신이니.


얘기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붙이자면,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자식 자랑하지 마시라. 자기 자식은 재수하고 있는데 친구 자식은 명문대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을 때, 앞에서는 ‘아이구! 잘 되었네. 축하해’하며 웃지만, 뒤돌아서는 ‘재수 없어!’ 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므로. 오죽하면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 라는 비틀린 명언이 등장할 정도일까.


또한 얄팍한 지식이나 경험으로 남들을 평가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마시라. 이런 이들일수록 자기는 공정하고 객관적 시각을 갖고 있다 표방하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보다도 주관적이고도 편파적 시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그 자신만 모를 뿐이다. 하여 면전에서는 ‘그렇군요’ 하지만, 뒤돌아서면 ‘쥐꼬리만한 지식과 경험으로 잘난 체하고 있네’라는 비판받기 쉽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내가 아직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있다는 단적인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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