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수영 일기 10화

수영을 시작하고 달라진 것들

파도는 우리를 얼마나 멀리 데려갈까

by Ronald

"지금 한창 킥판 잡고 음파하고 있을 시간이네"

"진도는 좀 나갔나? 접영은 시작했니?"

"이제 강습 끝날 시간 다 됐구먼"


수영을 마치고 핸드폰을 켜 도착한 스무 개 정도의 메시지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곧바로 홈버튼을 꾸욱 눌러 잠금을 해제시키고 경쾌하게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 보니 자꾸만 오타가 나서 백스페이스를 몇 차례 눌렀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하고자 한 소식을 완성했다. "얘들아, 나 중급반으로 올라갔어!"


숨 쉬듯 일상을 공유하는 몇몇의 친구들이 있다. 물론 업무에 치이거나 하루 종일 미팅에 붙잡혀 있는 날이면 거의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200개가 넘는 어마어마한 수다를 삽시간에 읽는 듯 마는 듯하며 대화방에 있던 수백 개의 숫자 '1'를 의무적으로 없애던 날도 있었다. 그룹 대화창에는 다들 오늘 점심은 뭐 먹니? 같은 가장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가기도 하고 오늘 미팅 시간에 마주한 찌질한 상사의 험담이나 최근 며칠 동안 이상하게 손목이 시큰거려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걱정과 염려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나에서 시작한 주제는 때로 세포 분열하듯 주제-1, 주제-2로 늘어나기도 하고 소제목-1로 변주되기도 한다. 그동안 지나간 수많은 주제들 중 요즘 대화방에서 인기 있는 주제는 단연코 수영이다. 이미 오랫동안 동네 수영장을 다니며 체력을 다진 친구들과 최근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 퍽이나 자연스러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친구들은 요즘 수린이인 나의 진도와 실력을 체크하느라 바쁘다. 대화 내용에는 그 정도면 잘하는 거라는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가 오고 간다. 마음이 느슨해지다가도 먼저 이 모든 과정을 겪어본 친구들의 조언을 통해 나도 다시금 마음을 잡곤 한다. 대화방에 <실시간 이슈 단어>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이 대화방에서 '수영'은 분명 상위권을 랭크되어 있을 것이다.


한 달 전, 생일을 맞은 나는 여러 사람들과 행복한 생일 주간을 보냈다. 생일날에는 가족들과 함께 가보고 싶었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축하 노래인 <생일 축하합니다>를 들으며 고구마 케이크를 잘랐다. 스스로 섬세함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섬세하고 겸손하기까지 한, H는 다소 높은 가격 때문에 섣불리 지르지 못하고 위시 리스트에 담아두기만 했던 향초를 깜짝 선물해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제치고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로는 생일이 한참 지나고 만난 친구가 툭 하고 건네준 수경, 일명 물안경을 꼽아야겠다. 마치 계절마다 새 옷을 구매하는 것처럼 수영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마음에 드는 신상 수영복을 구매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수모나 수경을 바꾼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막 수영을 시작한 나에게 서브 수경만큼 필요한 선물은 또 없을 것이다. 역시 수영하는 사람의 마음은 수영인이 제일 잘 아는 법이다.


나는 대부분의 활동을 혼자 할 수 있고 또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스무 살 무렵부터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 보는 것을 즐겼고 끼니때가 되면 식당에 가서 혼밥도 잘하는 프로 혼밥러다. 혼자 여행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나의 혼자력이 만렙을 찍었던 건 몇 년 전에 다녀온 쿠바 여행이었는데 여행 도중 비행기를 놓치고 러기지를 분실하는 엄청난 사건을 겪은 뒤 아바나에서 혼자 (2인분이 기본인) 빠에야를 먹고 있으니 '혼자 하는 건 이제 이 정도면 됐다'라는 생각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이후 나는 가능하면 혼자 여행하는 것보단 친구들과 여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함께하는 여행의 재미를 하나, 둘 알아갔다. 5년 동안 시드니에서 살면서 친구들과 함께 여행하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영화관에 갔다. 개인주의자 성향이 강한 나는 아직도 무언가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하면 적어도 혼자 하는 것보다 즐겁다는 사실을 안다.


어제는 친구들이 다니는 수영장으로 일명 원정 수영을 다녀왔다. 그들이 다니는 수영장은 시(市)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규모나 시설면에서 월등함을 자랑했고 나는 마치 시골에서 막 상경한 시골쥐처럼 휘둥그레 한 눈으로 처음 가 본 수영장을 구경하느라 분주했다. 안내 데스크가 아니라 일일 수영권을 판매하는 키오스크에서, 대규모의 탈의실과 샤워실에서, 그리고 너른 수영장에선 나도 모르게 "우와..."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동네의 어린이풀과 25M 레인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대운동장 같은 50M 수영장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지만 한편으론 무지막지한 길이를 보며 한없이 쪼그라들기도 했다. 내가 찰방찰방 온몸에 물을 끼얹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동안 친구들은 몸을 데피기 위해 물속에 풍덩 뛰어들어 멋들어지게 50M 레인을 단번에 완주했다. 자유형으로 시작했다가 자연스럽게 평영으로 영법을 바꾸고 레인 끝에 가서는 플립턴을 한 뒤 왔던 길을 다시 유유히 헤엄쳐왔다. 친구들을 보며 용기를 내어 출발했건만 50M 레인이 처음이었던 나는 당연히 중간에 몇 차례를 쉬고 나서야 레인 끝에 다다를 수 있었고 친구들은 그래도 수린이가 수영을 제법 한다며 내가 쉬지 않고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물론 너무 힘이 들 때는 수영장 벽에 붙어 친구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구경하기도 하고 친구들이 평영을 할 때는 물속으로 잠수해 발차기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수영을 하며 중간중간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출발하고 휴식 시간을 갖자 1시간 30분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수영을 마친 뒤에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그리고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메뉴를 시켜 나눠먹으니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었다. 함께하면 즐거운 일은 여럿이지만 그중에 수영을 빠뜨린다면 아무래도 나는 서운할 것 같다.


수영은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아무리 혼자 하는 수영이라도 막상 시작하고 보면 생각보다 많은 내외부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동안 운동신경이 둔해졌을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내 체력이 정말 바닥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뼈 아픈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컨디션이 좋은 날은 아직 죽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한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탓에 예전보다 배가 자주 고프고 이와 함께 자연스레 먹는 양도 늘어난다. 이렇게 혼자 감지할 수 있는 변화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에도 잔잔한 파동이 일어난다. 친구들과 신나게 점심을 먹는 동안 우리들은 프리다이빙이란 생소한 단어를 입에 올렸고 다 함께 휴양지에 가서 스노클링을 하면 또 얼마나 재밌을까 같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잔잔한 파동이 모여 커다란 파도가 되고 그 파도는 어쩌면 우리를 멀리 데려갈지도 모르겠다. 수영복과 바스 타월을 가방에 챙겨 친구들이 살고 있는 먼 동네까지 내가 수영을 하러 가게 될 줄은, 수영을 시작하기 전인 3개월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Manly Beach, NSW,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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