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8. 10. 07:44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존재감은커녕 없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럿이 모인 자리 몇 마디 하지 않아도 좌중을 압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럿이 모인 자리 쉴 새 없이 말을 하지만 남는 게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지나치면 안 하니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과하면 좋을 게 없다는 의미입니다. 과식은 건강을 해지고, 과음을 몸을 망가뜨리고, 과욕은 일을 그르칩니다. 또 하나 말이 많으면 관계를 망치기도 합니다.
책상에 앉아있기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없던 업무도 만들어 외근을 나갑니다. 외근 이래 봤자 현장 사무실을 가는 겁니다. 현장에 필요하거나 도움을 줄 부분은 없는지 알아보러 갑니다.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도 확인하고 앞으로 어떤 공사가 남았는지 물어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회사 사정에 대해 알려주기도 합니다. 본사에 어떤 일이 있는지 현장 직원도 궁금해합니다. 직원들 근황이나 수주 계획, 회사 일정 같은 부분을 공유합니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이니 내가 아는 걸 그들도 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굳이 숨기거나 말 못 할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 기준에 이 정도는 말할 수 있고 직원이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윗분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현장을 다녀가고 얼마 뒤 상무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대뜸 현장 직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다니냐고 따지듯 묻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별 말 안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전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현장 직원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살짝 어이가 없었습니다. 마치 저를 입이 가벼운 사람인 듯 말을 합니다. 기준이 다른 것뿐이었습니다. 회사 기밀도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은 듣고 흘릴 수도 있습니다. 들었다고 어디 가서 전할 그런 내용도 아닙니다. 아는 내용 몇 마디 전했다고 입이 싼 사람이 됐습니다.
관리이사가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제 자리 앞에 섭니다. 할 일 없냐고 농담을 건넵니다. 바빠 죽겠다고 앓는 소리로 대답합니다.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묻습니다. 바쁜 척하는 거라고 실없이 말합니다.
"엊그제 k부장 하는 거 너도 봤지? 그게 월급 받는 사람이 할 태도냐? 내가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 하겠다.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욕을 먹으면서 바뀌지 않는 거 보면 참 대단해. 나라면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은 데 말이다. 김 차장은 어떻게 생각해? 그게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해?"
아무 말 안 하고 눈만 껌뻑입니다. 딱히 받아칠 말도 없었습니다. 추임새만 넣을 뿐입니다.
"이번에 수주한 ㅇㅇ현장, 안 될 것처럼 애를 먹이더니 기어이 계약하게 됐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딱 그 모양이야. 중간에서 P 대표가 물심양면 애써준 덕분이다. 그러고 보면 P 대표 능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야. 가끔 술 먹고 헛소리만 안 하면 좋겠다마는. 그래도 이렇게 도움을 주니 옆에서 잘 보필해야겠다."
윗분들끼리 쉬쉬하던 일이었습니다.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 생각하고 두고 봤습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관리이사는 기꺼이 저의 궁금함을 채워줬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말을 안 하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또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면 하고 싶은 말만 할 수도 없습니다. 분위기와 상대에 맞게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면 말실수로 곤란한 상황을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필요한 말로 상대방의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실수나 오해 때문에 입을 닫고 살 수도 없습니다. 직장인에게 말은 처세에 꼭 필요한 기술입니다. 하고 싶은 말도 참을 줄 알고, 남에게 들은 말을 내 안에 담아둘 줄 알고, 꼭 해야 할 말은 당당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입이 무거우면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도, 곤란한 일도 덜 겪게 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니 우선 나부터 조심하는 게 맞지만 가끔은 주변 사람의 입에 오르며 원치 않는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해 오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입은 무거울수록 좋다는 겁니다.
현장 직원에게 회사 일을 말했다고 입 싼 직원 취급받았지만, 저는 소통을 했습니다. 상대방을 험담하는 말에는 입을 닫았습니다. 대구 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아야 할 게 아니기에 입을 닫고 있으니 저절로 알게 되는 때가 옵니다. 입을 가볍게 놀리지 않아서입니다. 말을 많이 해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입이 무거워 좋은 점도 있습니다. 입을 놀릴지 닫고 있을지 태도는 정하기 나름입니다. 입을 놀린다고 직장생활을 못한다고 할 수 없고, 입을 닫고 있다고 처세에 능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입니다.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요즘입니다. SNS 실언 한 마디면 쌓아놓은 걸 모두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흔한 사례만 봐도 입은 무거운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학생인 큰딸도 이미 학교 안에서 작은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수 한 마디가 퍼져 곤란한 일을 겪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남의 험담을 들으며 맞장구치는 일도 있을 겁니다. 입을 닫고 있어 화를 면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경험을 통해 배운다고 하지만 좋지 않은 일은 굳이 경험할 필요 없습니다. 말과 관련된 안 좋은 일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입이 무거운 거라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 입이 가벼워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지만, 입이 무거워서 피해를 본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을 겁니다. 학교 생활은 물론 사회에 나가서도 이것 하나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입은 닫고 귀는 열어라. 듣는 사람이 되면 상대방의 존경을 받을 수 있지만 말을 전하는 사람이 되면 상대방의 미움만 받을 뿐입니다.
2022. 08. 10.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