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15: 비상구]
(치익— 카세트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이제는 무언가 금속이 긁히는 듯 불쾌한 고음을 낸다. 기자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갈라져서, 문장을 맺을 때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흐른다.)
“...열다섯 번째 기록입니다. 이건 매일 새벽 경기도와 서울을 잇는 장거리 터널을 통과하던 한 통근자의 마지막 목격담입니다.
터널 중간, 비상시를 대비해 만들어진 그 좁은 안전 구역. 사람들은 그곳을 '대피소'라 부르지만, 어떤 존재에게는 산 자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매복하는 '대기실'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또다른 나를 마주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의 기록입니다.”
장거리 출퇴근은 지루한 반복의 연속이었다. 특히 밤 12시,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날 때면 마치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였다. 터널 중간쯤, 비상구 문이 달린 좁은 안전 구역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본 모습은 찰나였다. '유튜버인가? 아니면 사고인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 형체가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미동도 없이 터널 벽에 붙어 서 있는 사람.
오기와 공포가 뒤섞인 채 일주일째 되던 날, 나는 비상구 50m 전방에 차를 세웠다. 비상등의 주황색 불빛이 터널 안을 기괴하게 물들였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곳으로 뛰어갔다.
"저기요?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위험하게..."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터널의 노란 조명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건 나였다.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입술이 찢어질 듯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놈은 떨고 있는 내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내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래 기다렸어. 이제 교대할 시간이야."
어두운 터널 내부에 처절한 비명 소리가 한 차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갓길에 세워져 있던 차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는 매끄럽게 터널을 빠져나갔다.
백미러에 비친 운전자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인사를 건네고 침대에 눕는다면, 세상 그 누구가 그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까.
(카세트테이프의 잡음이 이제는 잉크가 끓는 듯한 소리로 변했다. 기자의 목소리는 이제 아주 희미하다.)
“...그 통근자의 차량은 다음 날 평소와 다름없이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직장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그날 이후 그의 말투와 행동이 미묘하게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마치 누군가 그의 인생을 '필사(筆寫)'하고 있는 것처럼요.
(바스락...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아까 들린 소리는 내 왼쪽 귀였습니다.
거울을 보니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누런 신문지가 뭉쳐져 있고, 그 위로 '실종'이라는 활자가 잉크로 박혀 있더군요. 이제 내 육체는 소리조차 종이의 질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
...방금 터널 비상구 문이 열리는 환청을 들었습니다. 누군가 내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군요. 나와 똑같이 생긴, 하지만 온몸이 하얀 종이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말입니다. 기록을... 멈춰선 안 됩니다. 놈이 내 자리를 완전히 차지하기 전에... 한 편이라도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