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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Nov 25. 2022

입을 만한 옷은 항상 없다

오늘 뭐 입지라는 클리셰에 대한 성찰

 송년모임, 신년모임이 많은 연말연시가 코 앞인 11월 말이다.  

 나 같은 순혈 K-아줌마들은 긴 인생 구력을 쌓는 동안 각종 로컬 필드에서 필연적으로 탄생한 소모임이 여러 개씩 있다. 동창 모임, 직장동료 모임, 애들 학교 학부모 모임, 이웃 모임, 동호회 모임, 그리고 남편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반강제적으로) 꾸려진, 아내들의 모임 등이다.

 평소에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연말에는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냐고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얼굴 보고 밥을 먹자는 인정 가득한 말들이 오간다.      

 

 나 역시 다음 주부터 연말까지 네댓 개의 만남이 예정돼 있다.

 어렵게 시간을 정하고 만남의 장소를 예약하면 자연스럽게 '어, 그날 뭐 입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 나 뭐 입지? 

   

... 그런데 이 고민은 왜 늘 반복되는 거 같지?






 동절기를 맞아 얼마 전에 옷장 정리도 했는데 왜 입을 옷이 없는 것인지, '오늘의 다은'님처럼 나도 특별한 날 입은 옷을 싹 기록해 둬야 할까. 그림을 못 그리니 사진이나 엑셀로라도.


todaydaeun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뭐 입지?'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애견과 산책을 나가거나 집 앞 편의점에 잠깐 갈 때에도 집에 누워있던 상태 그대로 나갈 수 없다면 모든 일상 중에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옷을 갈아입을 때는 당연히 '뭐 입지'라는 질문이 전제이다.   

 

 그런데 사교적 회동이 예정된 여자들은 특히 조금 더 '뭐 입지'라는 고민에 민감하다. 누구와 어디서 만나 어떤 일정을 소화하는가에 따라 옷뿐 아니라 곁들일 가방, 신발까지 매칭해야 하니 해법이 단순하지 않을 때가 있다.

  

 다행히 요즘은 통이 넉넉한 바지가 대세니까 살짝 통이 있는 바지에 도톰한 맨투맨이나 니트를 입고 초겨울에 적당한 두께의 패딩 재킷을 입는다면 중년의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젊은 감각을 살릴 수 있다. 이런 발랄한 차림이 좋은 경우는 만나는 대상이 허물없이 가까운 사이일 때다.


 만약, 나이 차가 제각각인 지인들을 오랜만에 보는데 서로 적당히 마음의 거리가 있는 이고 약속 장소도 살짝 비싼 레스토랑이라면? 설상가상 그 멤버 중에 항상 예쁘고 멋지게 하고 나오는 내 또래 여자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럴 때 섣부른 캐주얼은 자칫 대학생 딸의 옷장에서 빌린 느낌이 날 수도 있고 '요새 저 집 남편 벌이가 시원찮은가'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성격의 여성 모임에 50대가 너무 가벼운 차림으로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가면 진심 그럴 수 있다.

  

 그렇다고 옷장 속에 소중히 걸어둔 트위드 재킷에 내가 소장한 가방 중 가장 좋은 것을 들고 나타나면 '너무 신경 쓰고 나온 것' 같이 보일 수도 있다. 일부러 꾸민 티가 나면 오히려 촌스러워진다.

 나이와 무관하게 여자인 이상 옷차림에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꾸안꾸라고 하나, 공들여 꾸민 것 같지는 않은데 자연스럽게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젊은 감각을 살릴 코디가 필요하다.

 <아일랜드>나 <더 기버> 같은 SF 영화를 보면 미래에는 모든 주민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던데 그러면 이런 비생산적인 고민은 없을 것이다.  

 



 아, 이럴 때  버*리 프랭크비 스타일의 퀼팅 재킷이 있으면 딱 좋을 텐데 싶다.  

 연예인들이 입은 게 예뻐 보여서 몇 년 전에 버*리는 아니고 중저가 브랜드에서 비슷한 상품을 샀었다. 그런데 딸들이 '중국 아줌마 옷' 같다며 자꾸 웃었다. 퀼팅 재킷이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기분 상해서 결국 반품해 버렸는데 그 후로도 어쩐지 겨울이 다가오면 자꾸 버*리 퀼팅 재킷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 '진짜' 프랭크비를 입으면 예쁘지 않을까.     





 한가로운 오후에 가까운 백화점에 나가 보았다. 브랜드는 달라도 비슷비슷한 옷들이 전진 배치돼 있다. 이번 시즌의 유행 스타일인 것이다. 슬쩍 가격을 보면 새삼 눈이 크게 떠진다.

 이런, 참 비싼 세상이구나 싶다.

 지하 식품관으로 내려가 살 만한 것이 있나 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옷장을 열어보면 요새 입는 옷들이 빽하게 걸려 있다. 위칸에는 가방도 여러 개가 모셔져 있다.

 그래, 나는 옷이 없는 게 아니라 창의성이 없는 것이다. 유튜브를 열고 '화사 따뜻 겨울 코디', '40대 이상 연말 모임 스타일링 북' 등등을 보고 기죽은 감각을 살려보자.

 

요즘 자주 입는 옷들로 세팅한 내 옷칸



 그런데 가만있자, 오늘 저녁에 농구 보러 갈 때는 뭐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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