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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01. 2022

또 식기세척기를 돌렸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

 설거지할 것은 별로 없었다. 재택근무 중인 작은딸과 둘이 점심에 베이컨김치볶음밥을 해 먹고 난 였다. 수저 두 벌, 깍두기와 마늘종을 조금씩 덜어 놨던 2칸짜리 종지 하나, 예쁘게 담아 먹느라 꺼낸 큰 화이트 볼 접시 두 개, 프라이팬과 조리도구들이다. 어차피 도마나 볶음 주걱은 나무 재질이라 손으로 설거지를 한다. 식기세척기는 고온 스팀 때문에 나무 재질의 식기가 들어갔다 나오면 거칠거칠하게 벗겨지고 갈라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몇 개 안 되는 그릇들을 12인용 식기세척기의 하단에 넣고 2분의 1 모드로 돌리고 있다. 고만큼 넣고 55분을 돌리느니 휘리릭 하고 말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내가 그 설거지 5분을 하기가 싫어서다.


 나는 7년 된 식기세척기를 2년째 쓰고 있다. 2년 전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식기세척기가 빌트인 돼 있었다. 그렇게 우연히 식기세척기를 쓰게 되었다.

 아이들이 초중고를 보낸 집에서 15년 만에 이사를 하면서 가전제품을 전부 새것으로 바꾸었지만 식기세척기는 구입 리스트에 없었다. 꼭 필요한 가전제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집에 4년 동안 살던 전 거주자는 식기세척기를 와인 보관에 잘 쓰고 있었다. 2인 가족 살림이라 설거지거리가 없어 세척기를 안 썼다고 했다. 그보다 더 전 거주자가 이 분들이 이사 오기 일 년 전쯤에 주방을 올 리모델링하며 설치했고 집을 넘겨주면서 딱 1년 쓴 좋은 라고 강조했다는데 정작 전 거주자는 한 번도 안 썼다는 것이다.  

 '그 댁은 4인 가족이시라니 써 보세요'라는 말에 전용 세제를 구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제이모가 없는 나조차 식기세척기를 왜 '이모님'으로 칭송하는지 알았다. 나의 다음번 구입 가전은 최신형 식기세척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척할 그릇을 모으는 동안은 '세척중'이란 메모를 붙여서 혼용을 방지한다





 어릴 때 친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살았다. 부엌 옆 뒤꼍에 세탁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세탁기가 두 칸으로 나뉘어 왼쪽은 세탁, 오른쪽은 탈수였다. 왼쪽에서 세탁이 끝나 뚜껑을 열면 맑은 헹굼물 안에 옷들이 잠겨 있다. 그 옷들을 일일이 건져 오른쪽으로 옮기고 뚜껑을 닫고 탈수를 하는 방식이었다.

 세탁기는 엄마만 썼다. 할머니는 세탁기가 있어도 절대로 쓰지 않고 마당에 커다란 고무대야를 놓고 가운데에 나무 빨래판을 걸고 하이타이 거품이 가득한 물에 빨랫감들을 담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직접 손빨래를 하셨다.

 전기세아까워서이다. 손으로 하면 될 것을 세탁기 안에 넣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전기세도 잡아먹고 영 아니셨던 것이다. 쭈그리고 빨래를 하느라 허리가 쑤시고 손이 굽어도 할머니는 평생 손빨래를 했다. 등이 간지러울 때 할머니가 손으로 쓱쓱 쓸어주기만 해도 시원했다. 할머니 손바닥 이태리타월만큼이나 거칠었다.

 

낮잠 자는 우리집 노견의 손을 잡아 봄


 지금의 나를 할머니가 내려다보신다면, 아이구야, 해 좋고 바람 좋을 때 빨래를 널면 얼마나 좋은데 기계 안에다 넣고 전기세를 들여 말리고 있냐, 그릇 요만큼을 왜 저기 넣고 전기세를 들여 하세월을 돌리냐, 고 하실 것이다. 요즘 것들은 집에서 살림할 게 없다고 하실 것이 분명하다.

 '있으면 편리하다'는 말은 '없어도 된다'는 뜻이라고 다. 그렇게 보면 사실 '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은 별로 없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편리한'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편리한 것들을 낭비나 사치 없이 잘 쓰면 그만큼 아껴진 시간과 에너지를 활용해 더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 전기세가 아까워 세탁기도 못 쓰시고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입던 늘어진 러닝셔츠를 입고 사셨다. 나보다는 남편과 자식들 또 손주들이 먼저였던 할머니.  

 그 시절의 할머니들은 대부분 그랬지만 가끔 잠이 안 올 때 할머니를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여자로서의 할머니의 인생이 어린 나의 눈에도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살면서 한 번이라도, 하기 싫은 것을 하기 싫다고 거절한 적있었을까? 그 옛날에 딸로 태어나 칠십 평생을 여자로 살면서 말이다.


  반대로 설거지거리가 많은데도 직접 내 손으로 하나하나 씻어 내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한 노동이 하고 싶거나 배가 불러서 몸을 좀 움직이고 싶거나 다양한 이유에서다.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는 것은 정말 단순한데도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매우 힘다.

 정말 하기 싫지만 하기 어려운 일은 어쩔 수 없다 치고, 점심 먹고 난 설거지 같이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것은 맘대로 하면서 살아야겠다.

 

 이깟 설거지, 하루 이틀 안 한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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