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부엌

각자의 자리 사수하기

by 이명선

12월 마지막 날, 남편과 둘이 저녁을 먹고 동네 천천히 크게 한 바퀴 돌자고 집을 나섰다.

여느 토요일 저녁보다 거리에는 행인들과 차들이 별로 없고 상점들은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오히려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의 주택가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우리 집에서 산책하는 걸음으로 10분 정도 가면 지하철역이 있는 번화가가 나온다. 도로에는 승객 하나 없는 텅 빈 버스들이 신호 대기에 멈춰 있었다. 버스기사는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신호등을 응시한다. 버스는 승객이 있든 없든 막차 시간까지 정해진 제 길을 달린다.

손님이 한 명 없어도 불을 환히 밝히고 있는 빵집, 카페, 식당들을 지나쳐 걸었다. 사람들은 한 해의 마지막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매장을 지키고 있다.

누가 있든 없든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 덕에 우리는 휘청거렸다가도 다시 중심을 잡고 걸어가나 보다.

지하철역과 연결된 마트에 들러 1월1일 아침 떡국에 넣을 쇠고기와 와인 두 병을 샀다. 집에 와인과 같이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나 되짚다가 내 역할인 주부답게, 냉장고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월1일은 하루 종일 집에 머물렀다.

계획한 대로 냉장고 정리를 했다.

유통 기한이 지난 소스류나 식재료를 찾아서 싹 버리고 한번 만들어 쓰고 남았는데 들어간 재료들이 아까워서 보관하던 양념장들도 버렸다. 어머니들이 주셨는데 가족들이 잘 먹지 않는 오래된 반찬들도 버렸다.

한결 훤해진 냉장고 칸칸은 소독제를 묻힌 행주로 정성 들여 닦았다.

놀랍게도 다 필요한 소스와 시럽들

싱크대 키큰장의 맨 위칸은 무법지대였다.

최소 3년 동안 한 번도 안 쓴 거 같은 김밥용 밀폐용기도 두 개 나왔고 인터넷에서 한꺼번에 사놨던 근육통 마사지젤과 욕실 청소용 알약 같은 것도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과 사용하지 않아 먼지만 쓰고 있는 물건들은 버리고 유통기한이 임박한 영양제들은 가까운 곳으로 전진 배치했다.

쓰지 않는 유리컵들과 텀블러들도 과감하게 버렸다. 죽을 때까지 쓸 만큼의 텀블러를 이미 갖고 있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좋은 텀블러는 이제부터 잘 쓰려고 꺼내 놓았다.

모양이 예뻐서 보관하던 유리병들도 버렸다. 두 번 보면 또 쟁여 둘 것 같아서 돌아보지 않고 내다 버렸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는 말은 꼭 사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지, 묵은 물건들이 나간 자리는 확실히 숨통이 트이고 여유롭게 보였다.

부엌을 정리하는 것은 내 역할이다.

새해에도 변함없이 내 자리에서 주부의 일을 묵묵히 해야겠다. 어젯밤에 지나친 버스 기사님이나 빈 카페를 지키던 젊은 직원의 옆모습을 기억해야지.


새해 첫날밤의 부엌, 이 옆모습을 유지하자



친구들의 단체 카톡방은 새해 인사로 분주하다. 모두들 나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돈을 많이 벌자고 하는 친구, 상급지로 이사 가자고 하는 친구는 없다.

나도 올해에 이루고 싶은 일은 몇 가지 적어 두었다.

가장 작게는 '중간에 포기한 책들 완독 하기'부터, 가장 크게는 '내 이름으로 책 출간하기'까지, 대중소 사이즈의 레졸루션 리스트를 숨겨 놓았다.우리는 20여 일 후에 맞는 설날 연휴에 또 새해 인사를 나누고 새해 분위기를 내게 된다.

호기롭게 스타트한 새해 1월 첫 주의 인생 플로우가 어쩐지 맘에 안 드는 사람도 아직 두 번째 기회가 있으니 포기하지 말자.

한국인의 진정한 새해는 음력으로 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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