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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19. 2022

휘게와 술시와 불멍의 겨울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낮의 눈, 밤의 눈


 함박눈이 내린다.

 낮에 내리는 눈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하는 사람들도 많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눈이 내리고 날리고 쌓이는 단순한 자태를 사람들은 사진으로 남기고 공유한다.

 그러나 밤의 눈은 외롭다. 비와 달리 눈은 소리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아우성을 치며 내려도 직접 보지 않으면 사람들은 눈이 오는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 세상이 설경으로 바뀐 이후에야 우리는 밤새 눈이 온 것을 안다.      


낮의 눈




휘게의 시간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북유럽은 나에게 이상향의 공간이었다. 중학교 때 세계사 시간이면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하얀 분필을 집어 들고 칠판의 맨 왼쪽 맨 위에서부터 커다란 세계지도를 그렸다. 선생님이 처음 그리는 곳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다. '세계'라는 개념에 미숙한, 80년대 한국 중학생의 눈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세계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북유럽 나라들은 우리로서는 꿈도 꾸지 못 한 강력한 복지 국가였고 공교육만으로도 전 국민이 영어를 잘한다며 노점상조차(?) 유창한 영어로 관광객과 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도 있었다.


 몇 년 전부터는 '휘게'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휘게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소박한 삶을 중시하는 북유럽의 오랜 생활 방식이다. 장작이 타는 벽난로 앞 푹신한 카우치에 몸을 묻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이 떠오른다.

소확행, 워라밸 등 개인의 가치가 우선인 현대인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가치관에 딱 맞춘 개념이다. 어느덧 우리나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면서 점점 집단에서 개인, 사회에서 가정으로 가치의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해도 그의 가족 안에 애정이 없고 정신이 빈곤하다면 허무한 일이다.

 

 퇴근 후에 동료들과 밤거리를 헤매는 가장들보다 가족과 함께 소소한 저녁을 먹으며 편안한 집에서 쉬는 아빠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지면 좋겠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집을 가진 사람은 겨울바람 속에서 얼마나 든든한가.

 

 


 

나만의 술시


 한국인이 좋아하는 해외 작가로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를 빼놓을 수 없다.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 매대에 오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술시(술을 마시는 시간)'는 그의 프로필에 언급되면서 독자들에게 알려졌다.

 게이고는 매일 밤 혼자 혹은 지인들과 단출하게 술 한 잔을 하며 하루를 반성하고 내일을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가 어릴 때 늦은 밤까지 일을 하던 부친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그날을 마감하였다. 그런 부친행복해 보여서 어른이 된 아들도 그 술시를 따라 한다니 부친이 훌륭한 분이셨음을 짐작하겠다.

 

 매일 밤은 아니더라도 혼자 술이나 차를 한 잔 하 마무리하는 하루는 의미가 있다. 게이고식 술시 부담스러우니 대신 예쁜 다이어리에 메모하거나 얼굴에 수분팩을 붙이고 누워 그날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하루를 차분히 매듭짓는 시간 그 자체이다.

 '오늘 이건 참 잘했다',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건 좀 후회스럽네', '내일 무엇을 할까?'

 나만의 방식으로 지난 하루를 돌아보는 밤의 루틴은 당장 매일 할 수 있을 만큼 쉽다. 행복해 보이는 지인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는 루틴보다 건강에 좋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노화도 늦추는 불멍


 며칠 전에 책에서 '불멍이 노화를 늦춘다'는 연구 결과를 보았다. 마치 요가나 명상 효과처럼 불을 바라보며 심신의 평정을 유지하는 순간 우리 뇌와 몸이 젊어진다는 사실이다.

 

 제대로 불멍을 해 본 사람은 그 심플한 행위가 주는 힘에 공감할 것이다. 우리 집에는 휴대용 가스에 연결해 불멍을 즐기는 도구가 있다. 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로 불멍의 치유가 필요한 밤에 실내 전등을 다 끄고 검지 손가락만 한 불꽃에 마음을 맡기곤 한다. 그저 멍하니 불의 불규칙한 흔들림을 바라보는 동안 신기하게도 내면에 도사린 걱정거리와 불편한 감정을 잊게 된다. 불꽃 안에 층층이 쌓인 각기 다른 빛깔과 열에 집중하고 고양이 꼬리 끝처럼 일렁거리는 불꽃의 리듬에 감탄하며 시공간을 망각했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그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느낀다.

 

 다시 한 해가 저무는 겨울이다.

 사계절을 하루에 비유한다면 겨울은 밤의 시간이다.

 뜨거운 여름밤이 가고 우리에게 남은 건 긴 겨울밤들이지만 눈이 쌓이는 겨울밤이 아름다운 건, 휘게와 술시 그리고 불멍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불멍 도구, 가스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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