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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Nov 17. 2022

아이들은 자라서 수능을 본다

수능날이 따뜻해서 좋았다

 오늘은 2023학년도 대학 수학능력 시험일이었다.

 기나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환한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시험이 다 끝나고 수험생과 가족들이 고단했던 하루를 접으며 저녁상 앞에 모여 앉을 시간이다.

 신중하게 가채점을 하고 예상보다 점수가 안 나와서 절망에 빠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기대 이상으로 잘 봐서 기쁨에 겨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큰 고비인 수능이 끝난 날이니 잘 먹고 푹 자야 그다음의 경로를 찾아 다시 힘차게 떠날 수 있다.

 

 수능이란 시험이 끝난 거지 나의 대입 일정이 끝난 것도 나의 인생 플랜이 끝난 것도 아니다.

    


 

 아침에 가족들의 출근을 배웅하고 나서 바로 티브이를 켰다.

 마스크를 쓰고 보는 세 번째 수능날 아침의 긴장된 상황을 보며 수능과 아무 상관없는 나도 모두들 준비한 만큼 실수 없이 잘하기를 바랐다.

 우리 집에는 이제 대입을 앞둔 수험생은 없지만 '수능'이라는 단어만큼은 스펙트럼에 배열된 빛깔처럼 스미는 농도가 다를 뿐 매해 '오늘이 수능이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입시 방법 중에는 수능이 그나마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수능 평균점수가 제일 높은 층은 소위 교육 특구의 학생들이고 부모의 소득 분위나 유명 강사의 현장 강의 등 순수한 시험 외 옵션으로 버프 받기 때문에 완전히 공정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다른 대입 루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한 방식이며 순수한 노력에 정비례하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EBS 무료 인강을 들으며 성실하게 공부해서 수능 점수를 잘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지방 학생들이 상당히 많다. 주변에 변변한 학원조차 없고 공개된 입시정보 외에는 얻기 어려운 제한된 환경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성과다. 학원 바깥까지 긴 줄을 서서 선착순으로 수강 신청을 하고 엄마가 수업시간에 맞춰 대치동까지 라이딩을 하며 유명 인강 강사의 현강을 듣게 하는 친구들과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시험을 보는 수험생 본인이 가장 긴장하는 하루겠지만 학부모로서 겪는 수능날도 시간이 정말 더디게 가고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불안한 날이다. 이번 시험은 어떻게 출제됐는지, 세간의 예측은 어떠한지 계속 인터넷을 뒤진다.

  하루 종일 시계를 보면서, 드디어 시험 시작했겠네, 지금은 국어가 끝났겠네, 실수 없이 잘 봤을까? 점심 도시락은 맛있게 잘 먹었나, 3교시에 점심 먹고 멍하진 않겠지 이런 아이 생각에 온통 머리가 복잡하다.    

 

 가장 떨리는 순간은 어둑어둑한 학교 앞의 학부모 인파 사이에 끼어 시험이 끝나고 나오는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이다. 내 속으로 낳고 키운 아이의 눈매만 봐도 그 기분을 파악하는 게 엄마 아닌가.  

 어둠 속에 전구를 밝힌 건물에서 아이들 수 천 명이 한 번에 쏟아져 나올 때도 우리 애의 얼굴은 딱 보이기 마련인데 그 찰나의 표정이 어떨지가 정말로 두렵다. 아이가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주면 마음이 놓이며 그제야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다.      



 

 나는 수험생 엄마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세 번의 수능을 경험했다.

 큰딸은 한 번, 작은딸은 재수를 해서 두 번 보았다. 운 좋게도 딸들은 둘 다 수시에 합격을 했지만 수능 점수는 논술 전형에서 최저 등급을 맞춰야 해서 중요했고 혹시라도 수시에 합격하지 못할 때는 정시 원서를 써야 해서 더더욱 문제 하나가 소중했었다.

 수능 전 과목을 통틀어 가장 배점이 작은 문제가 2점짜리인데 그 2점에 1등급과 3등급으로 나뉘기도 하고 정시에서는 합불이 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를 불문하고 수능 점수는 인생에서 생각만큼 중차대한 것은 아니다. 

 꼰대 같은 말이지만 50년 넘게 살아보니 내가 SKY를 나왔는지 건동홍을 나왔는지는 지금 당장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이 선정해 놓은 기준처럼 엄청난 차이가 아니다.

 아기 때는 몇 살에 걸음마를 하고 몇 살에 말문이 틔였는지가 중요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받아쓰기와 수학 단원평가가 몇 점인지가 중요했고, 중학교 때는 어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지가 중요했던 것과 같다.

 

 대학 입학 후에는 어떤 대학 생활을 하는지, 졸업 후 진로는 어떻게 풀리는지, 만약 결혼을 한다면 배우자와 어떤 순간을 살게 되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때가 온다.

 

 인생의 시기에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옵션이 계속 바뀌는 것뿐이고 그렇게 사다리를 따라가다 보면 하루하루의 행복이 최고라는 당연한 귀결을 만나게 된다.    



 

 오랜 시간 의대를 지망해 온 딸이 오늘 수능을 마친 후배가 '우리 지금 초상집이에요'라는 톡을 보내왔다. 아마 기대만큼의 결과가 예상되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아끼는 후배 모녀가 오늘 하루만 좌절하고 내일부터는 새로운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설령 정시로 의대에 갈 성적이 안 나온다해도 그다음의 전략을 잘 짜면 된다.

 수능 시험장 앞에서 서로를 걱정하며 기다린 그 심정으로 앞으로도 팔짱을 꼭 끼고 길을 찾.

  

 수능이란 시험이 끝난 거지 나의 대입 일정이 끝난 것도 나의 인생 플랜이 끝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청춘 수능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물며 내 인생을 수능 시험이 좌우하지 않는다.

 오늘 수고로왔던 모든 수험생과 가족에게, 인생길에 50보쯤 앞서 걷고 있는 선배로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계단 하나를 올라선 거야'라고 속삭여 주고 싶다.   


                                             정말 수고했어, 사랑해!

 

작은딸의 첫수능때.. 시험 시작과 끝 시간에 시험장 앞에 모인 학부모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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