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스쳐간 자리에서
치열했던 시험 기간이 끝나고 학기말이 되면
우리는 담임 선생님이 호명하는 순서대로 교탁 앞으로 나가
얇고 긴 종이를 하나씩 받아 들고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구겨질 것처럼 작고 가벼운 그 종이에는
비밀스러운 숫자들이 일렬로 나열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 우리는 그것을 ‘꼬리표’라고 불렀다.
각 과목의 점수와 평균, 그리고 전교 석차까지.
알고 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숫자들이었다.
한 명씩 꼬리표를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오던
그 교실의 공기가 아직도 선명하다.
괜히 친구의 눈을 피하게 되던 복도,
슬쩍 서로의 종이를 훔쳐보던 시선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가방 속에 밀어 넣던 손들.
꼬리표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종이를 받는 순간부터
숫자는 우리 뒤를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공부 잘하는 애.” 혹은 “좀 부족한 애.”
한 줄짜리 숫자가 한 아이의 가능성을 요약했고,
등수 하나가 그 아이의 자리를 정했다.
시험을 망친 날, 나는 그 종이를 여러 번 접어
필통 속 깊숙이 넣어두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종이는 접히지 않았다.
성적이 잘 나온 날엔 어깨가 조금 올라갔고,
친구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한 톤 밝아졌다.
그 반대의 날엔 괜히 책상 서랍을 정리하는 척하며
고개를 오래 숙이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별 것 아닌 숫자들은 한동안 너의 어깨에 매달려
너의 하루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도 한다.
너라는 사람을 설명하기에 그 숫자들은 한없이 부족하고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사회가 정해놓은 통념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네 앞에서
나는 그 어떤 말도 다 조심스럽다.
너의 노력보다 적게 나온 숫자 앞에서
너도 무너지고 나도 위축되는 날에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관심받고 칭찬받던
어린 시절의 너를 상기시켜 본다.
무엇을 얼마나 잘 해냈는지가 아니라
그 자리에 네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던 시간들.
한 걸음만 떼도 박수를 받고
한 마디만 해도 온 세상은 널 향해 환하게 웃어줬다.
너는 여전히 그런 존재라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토록 얇고 긴 종이 한 장이
너의 하루를 규정하기엔 너무 작다.
숫자는 잠시 머물다 가는 표시일 뿐
너의 깊이와 속도, 방향까지는 알지 못한다.
혹시나
원치 않았던 결과와 과소평가된 숫자들이
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순간들이 오면
과감히 그 꼬리를 잘라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한 줄짜리의 숫자보다 훨씬 더 밝고 기대되는 이야기로
너는 잘 자라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숫자로도 등수 매길 수 없는
너의 소중한 성장의 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