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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기록 Jul 25. 2024

나의 목욕탕 탐닉기

목욕탕 가는 날

  



  나는 목욕탕을 탐닉한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았을 때 목욕탕에 가려면 1시간에 한 대 다니는 버스를 타고 통영 시내까지 나가야 했다. 귀한 목욕탕 체험은 겨울에만 한 두 번 할 수 있는 특별한 외출이었다. 다시는 목욕탕에 안 올 사람처럼 때를 밀어서 몸은 화투장을 붙인 것처럼 울긋불긋했고 등과 목은 따끔거렸다. 따가운 목욕을 하고 나오면 알싸한 겨울바람이 시골 소녀의 볼을 빨갛게 달구었다. 목욕탕 다음 코스는 으레 중국집이었다. 중국집도 목욕탕도 없는 촌구석에 살아서 시내 목욕탕에 가는 날은 명절날만큼이나 좋았다. 화투장이 있던 자리에 딱지가 앉았다 떨어지고 다시 때가 차오르면 계절은 봄으로 바뀌고 있었다.


  고등학생때 창원으로 온 후 목욕탕은 아무 때고 갈 수 있는 곳이었다. 20대 때는 목욕탕 다이어트를 해보겠다고 한 달간 매일 이용할 수 있는 월권을 끊어서 다니기도 했는데 피부만 벗겨지고 살은 빠지지 않았다. 하루는 머리를 감으면서 정수리 냄새나 없애볼 요량으로 치약을 바르고 마사지를 한 후 머리를 헹궜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가씨, 아까 보니깐 머리에 치약을 바르던데 그렇게 하면 좋아요?”

나쁜 일 하다가 걸린 것처럼 깜짝 놀랐다. 아주머니는 내가 치약을 짜서 정수리에 바르는 것부터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목욕탕은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곳이라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는 스포츠 경기장 같다. 폭포수를 요령껏 맞지 못한다고 처음 온 사람에게 삿대질 하며 텃새를 부리던 아줌마, 손바닥만한 장미 타투와 브라질리언 왁싱을 한 젊은 여자의 민숭민숭한 그곳에서 눈을 못 떼던 중년 부인들,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에피소드가 온탕 거품처럼 뽀글뽀글 솟아난다.


  이렇게 좋아하던 목욕탕을 못 가게 된 시기가 있었다. 출산을 하고 모유 수유를 1년 넘게 했더니 풍만했던 가슴은 온데간데없고 축 늘어진 시계추 두 개가 덜렁거렸다. 겨울이라 두꺼운 패딩을 믿고 노브라로 외출한 일이 있었다. 카페 안이 더워서 패딩을 벗었는데 앞에 앉은 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쳐다보았다.

“너 가슴 어디 갔냐?”

나는 가슴과 배꼽 사이쯤에 손을 얹고, ‘이 가슴으로 이번 생에 딴 남자 만나기는 걸렀겠지?’ 내 빈 가슴만큼이나 헛헛한 농담을 날렸다.

"엄니, 애기 젖 좀 멕이구유."

동병상련인 친구는 축 처진 젖가슴을 어깨 뒤로 넘기는 시늉을 하며 유머로 승화했다. 유두의 존재로 가슴 명맥을 유지하는 절벽가슴 울 자매는 볼 때마다 놀렸다. 내 가슴에 꽂힐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좀처럼 목욕탕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수한 봉긋한 가슴들이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그저 제 자리에 달려 있는 가슴이 부러웠다.


  아이가 5살 때 이사한 집은 3분 거리에 목욕탕이 있었다. 용기를 내서 목욕탕에 들어섰다. 망사 팬티와 브라만 입은 세신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옷을 벗기 시작하자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일 거 같은 문 앞에서 ‘화장실인가?’ 하며 서성대었다. 평상에서 티비를 보던 망사 팬티가 친절히 물어왔다.

“어디 찾아요?”

“여기 화장실이에요?”

“소변실이에요.”

엥? 소변실? 이 목욕탕은 특이하게 소변실, 대변실이 따로 있구나 생각했다.

일조

망사팬티가 또 물었다.

“소변실? 화장실?”

나는 작은 볼 일이라 밝은 얼굴로 정확하게 ‘소변실’ 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망사 팬티는 고개를 갸웃하고 ‘뭥미?’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했고 곧 의문이 풀렸다. 내가 소변실로 들었던 것은 ‘흡연실’이었다. 나의 짙은 피부색과 수술한 쌍꺼풀로 추리했는지 이때부터 나를 동남아 어딘가에서 온 여자로 단정 짓고 어찌나 친절히 화장실을 알려주던지... 

하마터면 ‘코쿤카’를 외칠 뻔 했다. 수건으로 수줍게 가슴을 가리고 여탕에 들어가는 나에게 망사 팬티는 과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사와디카’. 


  5년 만에 찾은 목욕탕 문간을 넘는 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슴이 신경 쓰였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어렵사리 다시 뚫은 목욕탕을 꾸준히 다녔다. 하루는 목욕탕 단골이 팔 깁스를 풀었다고 목욕탕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박카스를 돌리는 골든벨을 울렸다. 동남아에서 온 이주민 취급도 받고 박카스도 받았던 목욕탕은 몇 년 후 폐업하고 말았다. 정들었던 목욕탕이 폐업했을 때는 고향 한 귀퉁이가 사라진 듯 허망했다.


  긴 세월 자리를 지켰던 수많은 동네 목욕탕이 코로나19에 직격탄을 맞고 줄줄이 폐업했다. 묵은 추억들이 스며 있는 목욕탕을 없애기 아쉬웠는지 가끔 카페로 변신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올해(2024년) 3월에 109년 역사를 지닌 대전유성호텔이 폐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폐업 2주전에 유성호텔 온천탕에 몸을 담궜다. 어린 시절 마을 어른들이 농한기인 겨울철에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대전까지 온천욕을 다녀오곤 했었다. 생선 비늘 털어내고 비린내 풀풀 나던 통영 촌부들이 이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서로 등을 밀어주며 웃고 수다를 떨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찌릿했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온천욕으로 촌때가 벗겨질리 만무했겠지만 1년 농사의 고단함은 확실히 벗겨졌을 거 같다. 대전 특산물이 땅콩은 아닐텐데 엄마는 온천욕을 다녀오면 늘상 땅콩을 사오셨다. 당시에는 성심당이 이 정도로 유명하지 않았나보다. 나는 이번에 가서 성심당 빵 맛도 보았다. 온천욕의 맛 보다 성심당 빵 맛에 빠져들어 빵을 사러 정기적으로 대전에 간다.


  나는 우리 동네를 벗어나 다른 동네 목욕탕까지 다니는 수고로움을 감행했다. 최근에는  온양온천까지 다녀왔다. 왕복 4시간이 넘는 긴 지하철 여정에서 안 읽히던 책을 완독한 건 또 다른 쾌감이었다. 목욕탕은 대부분 온탕, 열탕, 냉탕, 사우나, 세신실, 샤워기 공간으로 구조가 비슷비슷하지만 그 지역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지방에 여행 가면 그 지역 목욕탕에 꼭 가보려고 한다. 지방으로 갈수록, 목욕탕이 작을수록 단골의 텃새가 심한 건 공통된 특징이다. 아래 지방으로 갈수록 시끄러운 것도 특징이다. 얼큰한 사투리로 얼굴도 모르는 그 동네 사람 사는 얘기에 귀를 쫑긋하고 듣게 된다. 수다 무리에는 목소리가 크고 재밌게 말하는 사람이 꼭 있다.


  대중목욕탕에서는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다. 염색금지, 빨래금지, 샤워 후 탕에 들어가기, 비누 쌔벼가지 않기, 수건 쌔벼가지 않기, 면봉 쌔벼가지 않기, 드라이기 동전 쌔벼가지 않기. 마지막으로 방금 나간 뚱땡이 아줌마 뒷담화 하지 않기. 이 정도만 지키면 훌륭한 공중목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은 멀리까지 목욕을 다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방랑벽처럼 방랑목욕벽이 있다고 우겨볼까? 목욕탕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며칠을 생각해봤는데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다. 내가 목욕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닐텐데, 아기가 엄마를 좋아하듯 목욕탕을 좋아하니 이유를 대지 못하겠다. 어쩌다 목욕탕에 매료됐는지 사유도 모른 채 수십 년째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40도 온탕에 몸을 담그고 차갑고 달달한 냉커피 한 모금을 넘기는 그 순간이 절정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제서야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얼굴엔 낯꽃이 피어오른다. 묵은 때는 벗겨내고 갓 지은 추억은 담아오는 목욕탕. 나의 목욕탕 탐닉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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