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이해하지 마세요, 암기하세요.
관계에 대하여
30대 초반
일에 어느 정도 숙달이 되고
혈기왕성한 시절
회사 동기들과
사무실에 폭탄이 없으면
내가 폭탄이다!라는 말을 하며
불합리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들
자기 일을 타인에게 미루는 사람들
업무능력이 낮은 사람들
등등의
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재단하고 판단하며 했지요.(얼마나 그게 어리석은 것인지... 내 도마 위에 오른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합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
저렇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걸 왜 모를까?
라며 내 이해의 한계를 벗어난 사람들을
탓하고 미워했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관계가 더 어려웠습니다.
관계는 내 맘대로 절대 안 되니까요.
폭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너무너무너무 잘 보여서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가슴은 항상 답답하고 화병에 걸린 것만 같았죠.
약 10년 만의 복직을 앞두고 발령지가 결정이 나면서
제가 근무하는 곳에 폭탄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복직을 하고 보니, 사무실의 오묘한 분위기를 감지했습니다. 내게 누가 폭탄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폭탄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느껴졌습니다.
홀로 섬같이 있는 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계속 근무를 하다 보니,
직원들이 그분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분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과 이미 근무한 경험이 있는 동기들의 걱정 어린 이야기들도 들려왔고요.
직원들이 그분을 폭탄이라고 말하는 이유에는
업무 기피, 잦은 오타, 매우 기본적인 업무 실수 등의 업무 관련 문제도 있었지만
사무실내 간식을 다 먹어버린다던지
내방객들을 위해 준비해 둔 음료를 다 먹어버리거나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거나
사회성과 관련된 문제도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제가 그분을 직접 경험해 보니
소문대로..... 정말 그렇더군요.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만나본 직원 중에 가장 일을 못하고 사회성이 매우 떨어지는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 마음은 그렇게 힘들지가 않았어요.
예전의 나라면
무척 분노하고 울화통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을 텐데요.
지금의 나는 그런 마음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습니다.(제가 늙어서 기력이 쇠해진 것일까요?)
10년의 나와 지금의 나에게 큰 차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직원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찾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대체 이해가 안 돼!라는 마음조차 들지 않아요.
그리고 그분의 성격, 태도를 바꿔야겠다!라는 마음도 없습니다.
이순신에게는 13척의 배가 있었고
나에게는 10년의 육아휴직경력과 3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엄마가 되고 나서
많은 것들이 힘들지만(정말 정말 정말 정말 많은 것이 힘듭니다. 모든 엄마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응원 보냅니다.)
가장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인데
그래서 내가 사랑해야 하는 아이인데
울화통이 터지고 미쳐버리는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를 미워할 수 조차 없습니다.
나를 가장 큰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존재가
내가 낳은 아이라니....
엄마인 내가
사랑해야 하는 아이들인데
내가 그들에게
세상 그 누구에도 하지 못했던
분노와 화를 표출하고
냉담하게 대하는
나의 바닥(그 바닥은 매번 그 깊이를 갱신하는 신비를 가지고 있습니다.)을 보여주게 되는 순간을
수없이 마주하게 될 때
내 존재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10년 경력동안 나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아이를 내 뜻대로 바꾸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엄마에게 자식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렇기에 엄마는 자식에게 가장 취약하게 됩니다.
엄마의 고통과 슬픔과 삶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투사가 됩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 힘듭니다.
내가 임신 중에 라면을 먹어서 아이에게 아토피가 있나?
내가 잘못 키워서 저 아이가 저렇게 행동을 하나?
쟤가 동생들을 놀리는데,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 놀리면 어쩌지?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면 어쩌지?
내가 너무 많이 혼내서 아이들이 주눅 들면 어쩌지?
아이들 안 혼내고 싶은데 우리 엄마가 날 너무 많이 혼내서 나도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구나.
지금, 여기에서 사랑스럽게 잘 자라고 있는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덧칠된 아이만 남게 됩니다.
아이가 너무 귀하기에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이 두려워집니다.
아이가 잘못될까 너무 두렵기에
내가 아는 안전한 방식을 아이에게 강요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 방식으로 아이들 바꾸려고 하는 순간
가정의 평화는 와장창 무너집니다.
내 삶도, 아이의 삶도 불행의 길을 가게 됩니다.
두려움으로 시작된 비극이
강요라는 파국으로 내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비극과 파국을 오고 가는 하루하루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는 매일매일 혹독한 트레이닝을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이유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빠는 이유가 애정결핍 때문인가?
다리가 오자가 인 건 내가 너무 많이 업어서인가?
세 남매가 사이가 나쁜 이유는 내가 더 큰 사랑을 주지 못해서인가?
아이의 (지극하게 개인적인 기준으로 판단한) 부정적인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이유 찾는 것을 멈추는 것.
그저,
내가 절대 다 알지 못할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것을 연습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 너무나 불행해지기에, 거의 항복의 느낌으로 연습했습니다.)
아이들을
그저 날씨처럼 바라봤습니다.
흐리다 맑았다 천둥 치다 개었다가.
거기에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일어난 현상일 뿐이지요.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구는
태양이 너무 뜨거운 이유를 굳지 찾지 않고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이유를 굳이 찾지 않고
토성이 고리를 가지고 있는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 사람의 행동의 이유를 찾는 것은
나만의 기준을 덮어씌우는 것이고,
지구가 태양에게 너무 뜨거움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지구가 달에게 내 주위를 도는 것은 너무 의존적이라고 말하고
지구가 토성에게 고리는 지저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존재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나와 똑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모습이든, 이유가 어쨌든
그 존재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임을
엄마가 되고도 한참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존재를 그저 받아 들 일 때
각자의 방식으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실현하는 것이
엄마 10년 경력동안
가장 크고 방대하고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자기가 직접 가위로
토끼인형 귀를 잘랐으면서
토끼인형 귀가 잘렸다고 우는 아이를 저는 아직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뻐 보이고 싶다고 얼굴에 스티커를 붙이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티셔츠와 치마와 양말을 고르는 아이를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아이들의 모든 행동들을
평생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아이들은 나와 전혀 다른 기준을 지닌
나와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나의 기준으로 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바래서도 안되지요.
A 다음에 B가 있고 그다음에 C가 있는 것처럼
저는 아이들의 삶을 그냥 바라봅니다.
그냥 암기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후회와 두려움에 끌려다니지 않을 때에,
그냥 내 곁에서 사랑스럽게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온전한 존재로
서로가 함께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러할 때
어떻게 서로 함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과 상처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함께할 때
모두를 위한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공전과 자전을 할 때에
가족이라는 은하계가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다 같이 청소를 하는 데에
자리에 앉아있는 그 직원에게
미움과 원망 없이
"함께 하시죠!"라고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무실의 경비로 구입하는
과자와 음료를
함께 나눠서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당연한 말을
과거와 미래를 오가지 않고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암기목록>
첫째는 계란을 슬퍼서 먹기 힘들어하지만 치킨은 무척 좋아한다.
둘째는 숙제하는 것은 싫어하지만 숙제를 못해가면 운다.
셋째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지고 싶어 하지만 세수하기를 싫어한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타인과 연결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