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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Oct 24. 2021

그 시절 설탕물국수

길심씨가 보내준 청태로 콩국수를 만들었다. 비타민C가 많은 청태는 이름 그대로 겉껍질부터 속살까지 푸르다. 국수사리 위에 갈아놓은 콩물을 부었다. 푸른빛이 돌아 색깔이 시원하고 곱다. 꿀도 밥숟가락으로 크게 한 스푼 뚝 떠서 얹었다. 작은 얼음도 와르르 쏟았다. 젓가락으로 잘 섞은 다음 후루룩!.

“으음,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 보다 훨씬 달달하니 맛있네.”

했더니 딸이

“으음, 진짜 맛있다.”

한다. 이 달달한 국수 한 젓가락이 문득 나를 유년시절 시골집에 다녀오게 했다.    


“아야, 유천아짐 집에 가서 물 좀 받아 오니라잉.”

하는 날엔 설탕물국수를 해 먹는 날이다. 여름 한낮, 풀들도 시들시들 맥없이 몸을 축 늘어뜨린 불볕에 노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집을 나선다. 유천아짐은 아직 들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샘이 깊은 유천아짐집 큰 갈색 고무다라이에서 마중물을 한 바가지 들이붓고 한참이나 펌프질을 한다. 샘이 깊을수록 여름엔 시원한 물이 나오고 겨울엔 따스한 물이 나왔다. 많은 펌프질 후에야 나오는 시원한 물을 주전자 가득 받아 흔들흔들 시원한 오솔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숨을 헉헉거리며 마루에 내려놓은 주전자에서도 내 이마에도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한여름, 설탕물국수엔 차가운 물이 있어야 진가를 발휘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었다.     


길심씨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국수를 삶았다. 아버지는 텃밭에서 풋고추를 한주먹 따서 상위에 올렸다. 국수사리 위에 하얀 설탕을 소복이 올리고 길어온 시원한 물을 부었다. 쌓인 함박눈이 겨울 가랑비에 스러지듯 설탕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걸로 설탕물국수 완성이다. 특별한 것도 없고 요리랄 것도 없던 국수가 그 시절엔 왜 그리 맛있었을까? 설탕이 귀해 사카린을 넣어 먹는 집도 있었으니... 젓가락으로 국수사리를 한 젓가락씩 건져 후루룩 먹고 숟가락으로 설탕 국물을 한 수저씩 홀짝홀짝 떠먹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남은 설탕 국물은 두 손으로 그릇을 받쳐 잡고 남은 한 방울까지도 남김없이 마셨다.  

   

그때의 그 달달함이 좋아서 지금도 콩국수를 먹을 때면 꿀을 잔뜩 넣어서 달달하게 먹는다. 지방마다 다르지만 내 고향에서는 콩국수에도, 팥칼국수에도, 새알팥죽에도 설탕을 넣어 먹었다. 길들여진 입맛은 쉬이 변하지 않았다. 수년 전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 아들네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40여 년을 살았다. 고향 맛에 길들여진 할머니는 여름이면 아들, 며느리, 손자 아무도 안 먹는 설탕물국수를 홀로 드셨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늘 마시던 딱 한 잔의 소주와 함께.  

  

누군가의 말처럼 "음식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고향이기도 하다. 할머니에게 설탕물국수는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에게는 냉면이, 할머니에게는 설탕물국수가 고향을 기억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 맛에서 두고 온 고향집을 그리고 산과 들의 내음을 맡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음식이 다른 누군가에는 특별한 음식이 되기도 한다.    

       

머리가 굵어지고 고향을 떠나와 살게 되면서부터 설탕물국수는 추억으로만 남았다. 바쁘게 살다 보니 잊어버리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음식이라고 한 번도 해 먹어볼 생각도 안 했다. 이제 세월이 흐르니 그 맛이 그립고 간직하고픈 맛이 되었다. 설탕물국수는 해 먹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특별한 비법이 필요하지도 않다. 하지만 고향에서 먹던 그 시절의 향수를, 그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있다. 지금 먹으면 그때 그 맛이 사라질까 봐서일 수도 있다.   

  

내 어린 시절의 고향집도 변하고 펌프 샘도 사라진 지 오래다. 샘이 깊은 유천 아짐 집도 빈집이 되었다. 물 받으러 오가던 오솔길도 시멘트 길이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도 이제는 설탕물국수는 안 드신다. 지난여름, 시골살이 중 콩국수를 먹으며 나는 길심씨에게 물었다.

"엄마, 근데 왜 지금은 설탕물국수 안 드셔?"

"우리는 콩국수를 해먹응께 안먹제. 그란디 동네 사람들은 아직도 다 설탕물국수를 해 먹제"

한다. 한 여름 콩국수를 먹는 날이면 나는 아직도 그 시절 설탕물국수의 기억으로 유년의 뜰을 서성거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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