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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Oct 23. 2021

시장이 반찬? 나이가 반찬?

읍내에서 자취를 하던 시절이었다. 시골 우리 집에서 읍내 여고까지는 약 5km, 아침에 7시부터 자율학습을 시작한다는데 도저히 그 시간에 등교할 수 없었다. 아침 첫 버스를 탄다고 하더라도 불가능이었다. 읍내 사립 여고에서 좋은 대학을 보내겠다고 내린 특단의 조치로 도보나 자전거로 통학이 불가능한 아이들은 고2 때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읍내의 시장통 골목길을 오르면 주택이 있었다. 그 집의 한쪽 방에 친구랑 셋이서 살림을 차렸다.    


마당 한쪽에는 수도가 있었고 큰 갈색 고무 대야에는 늘 물이 가득했다. 마당을 지나 우리 방 옆으로 가면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고 더 안으로 돌아가면 부엌문이 있었다. 부엌에는 싱크대도 수도도 없었다. 뒷문은 휑 하니 뚫려 있고 뚫린 문으로 쥐들이 들락거렸다. 연탄아궁이에는 큰 냄비를 올려놓았다. 냄비에 물을 덜어다 추운 겨울에는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부엌은 깊었고 천장은 낮았다. 부엌 천장은 방에서는 다락이었다. 비키니 옷장도 하나 없이 옷은 벽에 못을 박아 옷걸이에 걸었고 이불은 다락 위에 얹어 놓았다. 다락이 이불장인 셈이었다. 화장실은 주인집 식구들과 푸세식을 사용했다. 그래도 불편한 줄을 몰랐다.    


주말이면 집에 다니러 갔다. 토요일 오후, 일요일 오전 집에서 실컷 농사일을 거들다 엄마가 싸주는 김치 한통씩을 들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말이 입시를 위해 자취를 했지, 학교 등교시간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셋이서 각자 집에서 들고 온 김치 맛은 다 달랐다. 다른 밑반찬도 없이 달랑 김치만 동그란 스텐 김치통에 담아 보자기 싸서 들고 왔다. 냉장고도 없어서 여름에는 수돗가 고무대야에 담가 놓았었다. 김치통은 월요일, 화요일을 지나 날이 갈수록 가벼워져 갈색 고무통에서 유유히 둥둥 떠다녔다. 보온도 안 되는 전기밥솥의 밥을 퍼서 다 시어빠져 궁둥내가 나는 김치 한 가지에 먹어도 꿀맛이었다. 시험기간이라도 걸리는 주에는 집에 못 가서 그 한 가지 김치도 떨어져 간장에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곤 했다. 그래도 밥맛은 일품이었다.     


이러저러 고3이 되면서 자취방을 옮겼다. 친구는 그대로 셋이서 함께였다. 난 늘 얌전해 보이고 착실해 보였지만 공부는 흉내만 내고 있었다. 그때 공부할 이유를 찾았고 공부하는 방법을 더 잘 알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가끔 생각해본다. 지났으니 하는 말이다.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에 열심히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노는 애들처럼 놀지도 못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사는 모양새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사람은 타고난 대로 살아야 하나, 바꾸려 해도 늘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제 이런 나를 인정하며 틈틈이 노는 듯이 책 읽고 노는 듯이 글쓰기를 한다.    


같은 재단의, 같은 운동장을 쓰는 중학교에 다니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있었다. 나이로는 다섯 살 터울이지만 학교로는 사 년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 엄마가 싸주는 점심 도시락을 들고 아침이면 교실로 찾아왔다. 어머니는 자주 제육볶음을 해서 상추랑 된장을 싸서 보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고마운 마음도 없이 친구들이랑 앞뒤로 둘러앉아 상추쌈을 입이 미어져라 먹었다. 우리 엄니 길심씨는 알았으려나. 상추쌈 후에 잠이 엄청 밀려온다는 사실을. 그때 친구들이랑 먹었던 제육볶음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글을 쓰다 보니 그 맛이 살아난다. 길심씨는 농사를 지어가며 바쁜 시간에 고기를 볶아 싸 보내주고 동생은 아침 통학 군내버스에 제 책가방에 보자기에 싼 내 도시락까지 들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해 나는 가장 가까운 대도시의 국립대학에 원서를 쓰지 못하고 사립대학에 지원했다. 꿈도 열망도 없었으니 당연지사였겠지만. 어머니는 나를 대학에 보낼 마음도 없으면서 도시락을 싸서 보냈다. 대학 합격자 발표일 학교 게시판을 눈으로 더듬더듬 확인하고 온 날 어머니는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고샅길 뒷산에서 갈퀴나무(소나무 잎)를 부지런히 긁고 있었다. 그때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아주 무심하게 나무를 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합격은 했드냐?”

나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응”

했다.

“아이고, 나는 대학 못 보낸다. 농사지어 어떻게 대학을 보내것냐?”

말은 이렇게 했어도 어머니는 그때 이미 대학 보낼 요량은 해놓은 상태였다.    


어찌어찌 그 도시에 자취방을 얻어 또 자취를 하게 되었다. 동네에 순전히 농사지어 대학 보낸 사람이 없어서 돈이 얼마나 들지 가늠이 안 될 때에는 어머니는 나에게 야박하게 굴었다. 그때는 알바가 없던 시절이었다. 길심씨는 보낼만하다 계산이 설 때는 경제적으로 풀어 주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동생이 대학 들어갈 때쯤 엄마는 한 번 보내봤으니 훨씬 더 여유로워졌다. 나는 취업을 해서 서울로 입성하고 결혼 전까지 자취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때도 반찬은 여전히 길심씨가 보내준 김치 한 가지였지만 밥 한 그릇은 뚝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만큼의 김치 맛은 사라졌다. 그때는 김치밖에 없어서 더 맛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만 먹어서 질릴 법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시장이 반찬이 아니고 나이가 반찬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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