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난희 Mar 04. 2021

모든게 정성

냉장고에서 콩나물 봉지를 꺼냈다. 개수대에서 씻으려니 가는 뿌리털이 많이 달린 길심씨의 재콩나물 생각이 났다. 시중에서 파는 콩나물은 길심씨의 재콩나물과는 생김새도 다르고 그 맛도 하늘과 땅이다. 아무리 양념 듬뿍 넣고 정성을 다해 팍팍 무친다 해도 재콩나물 맛을 절대 흉내 낼 수 없다. 그래도 좋아하니 자주 사다 먹곤 한다. 재콩나물은 예로부터 남도에서 집집마다 길러 먹던 전통방식의 콩나물 재배법이다. 물만 주고 기르는 일반적인 물콩나물 하고는 그 맛이 사뭇 다르다.     

  

집집마다 가장 만만한 반찬은 콩나물이 아닐까? 가성비로도 콩나물을 따라올 나물은 없다. 생육기간이 짧고 재배가 비교적 쉽다. 며칠 만에 길러서 먹을 수 있는 나물은 아마도 콩나물, 숙주나물뿐 일거다. 거기다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반찬이다. 우리 아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콩나물 무침은 무조건 좋아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콩나물을 좋아했다. 그 엄마의 그 딸들. 또 그 엄마의 그 딸들.


중학교 시절, 농번기 때 바빠서 재콩나물을 기르지 못할 적엔 나의 엄마 길심씨는

"학교 끝나고 저자에서 콩나물 좀 오니라" 하며 구깃구깃한 돈을 건넸다.

하굣길에 바닥에 물이 질척 질척 흐르는 저자(읍내 작은 상설시장)에 들르는 일은 아주 귀찮았다. 거역할 수 없는 길심씨의 심부름이니 어쩔 수는 없었다. 자주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버스에 오르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콩나물을 많이 먹어 키가 큰가 보다고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친구들중에 콩나물봉지를 들고 차에 오르는 애는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창피하지는 않았다. 귀찮았을 뿐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집 샘가 장독대나 안방 한쪽 귀퉁이에는 검은 천을 뒤집어쓴 커다란 옹기시루가 앉아 있었다. 길심씨는 명절이나 아버지 생신, 모내기, 탈곡하는 날 등등  큰일을 앞두고는 늘 재콩나물을 검은 옹기 시루에 안쳤다. 자식들이 결혼하고도 딸, 사위, 손자가 온다고 하면 어김없이 콩나물을 길렀다. 겨울에는 그 일주일 전부터, 여름에는 3, 4일 전에 큰 옹기 시루에 콩나물을 안친다. 다 자란 콩나물을 숭숭 뽑아 샘가에 앉아 일차로 재를 털어 낸다. 이차로 검은 모자를 쓰고 나온 콩나물 녀석들의 모자를 벗기며 씻는다. 엄마는 이렇게 한나절을 샘가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쪼그려 앉아 공들인 시간만큼 말쑥해진 재콩나물을 굵은소금 살짝 넣고 데쳐 낸다. 파, 마늘 넣고 갓 짜 온 참기름에 엄마의 마디마디 구부러진 큰손으로 조물조물 무쳐 커다란 접시에 산처럼 쌓아 밥상에 올린다. 딸, 사위, 손주들의 젓가락질이 바쁘다. 큰딸, 작은 딸은 콩나물에 토하젓을 올려 한 숟가락씩 비벼 입이 미어져라 먹는다. 하도 맛있게 먹으니 덩달아 사위들도 토하젓을 올려 먹어 본다. 그 맛을 알았는지 연신 콩나물과 토하젓으로 젓가락이 간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길심씨의 입은 벌어져 내내 다물어지질 않는다.

  

정성이 담뿍 들어간 재콩나물을 안 먹어 본 사람은 알 리 없다. 콩나물 대가리는 씹을수록 고소하고 줄기는 약간 질긴 듯 씹는 맛이 일품이다. 실컷 먹이고도 모자라 콩나물을 봉지봉지 검은 봉지에 싸 놓고 가져가라고 내놓는다. 그럼 딸내미들은 그 정성을 아는지 마는지 "잘 먹을게" 한마디로 때우고 만다. 서울 올라와서 "엄마 콩나물 너무 맛있어" 하면 그다음엔 콩나물 봉지가 더 커졌다. 밭을 기어 다니며 콩 농사를 짓고 콩나물 기른 엄마의 마음이 애잔하게 와 닿는다. 길심씨도 이제는 팔순이 되어 재콩나물이 추억의 음식이 되어가고 있다.   


 나중에라도 내가 시골에 살게 되면 재콩나물을 꼭 길러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많이 덥제? 별일 없어?"

"별일 없제. 느그는 잘 사냐?"

"그럼! 근데, 엄마는 콩나물을 어떻게 그렇게 잘 길러?"

"엄마가 기른 콩나물 먹고 싶네"

"내가 콩나물은 잘 기르제, 나 시집오기 전에 느그 외할머니도 이모들이 많아도 맨날 나한테 콩나물 안치라고 했제"

"아, 그랬어"

"그람, 여그 동네 사람들도 내가 잘 기른께 나한테 물어 보제. 기르기 어려운께 내가 길러서 나눠주면 좋아 하제. 나한테 길러서 팔라고도 하더라만 아이고, 못해“     

멍석을 깔아 드렸더니 말씀이 많아졌다..  

  

"엄마, 재콩나물은 어떻게 안친당가?"

"콩은 좋은 놈으로만 골라야제.  

콩은 백태나 준저리콩(쥐눈이콩) 한나절 넘게 불려 놓고.

볏짚은 태워서 재가 바스라지지 않게 잘 준비해 놓고잉.

옹기 시루에 시루보 깔고, 지푸라기도 좀 깔아야제.

그라고는 볏짚 태운 재를 깔고 그 위에 콩을 얹으면 되제"

"시루떡 앉히듯이 하면 되겠네"

"그라제. 재 올리고, 콩 올리고 젤 위에는 재를 올리고 지푸라기 뚱글게 말아서 얹어 주면 좋제.

그래야 물이  골고루 스며들고 좋당게.

인자 물을 호복이(듬뿍) 줘서 잿물을 빼줘야 콩이 썩지를 않제.

안그람 재가 독해서 콩이 썩어불제.

여름이면 한 이틀이나 있다 물 한번 더 주고 또 하루 이틀 있다 물 주고 물이 다 빠지고 나면 뽑아서 씻어 먹으면 되제.

음식은 정성이여. 음식만 정성이것냐. 이 세상 모든 것이 정성이제"    


전화를 끊고도 며칠 동안이나 엄마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엄마가 음식만 정성으로 했을까. 남편도 정성으로 받들고, 자식도 정성으로 키우고, 농사도 정성으로 지었다. 마당에 나무도, 꽃도 정성으로 돌봤다. 그래 맞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정성이지. 정성을 따를 만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온 콩나물이지만 정성으로 무쳐본다.


혹시 영암을 지날 적에 운이 좋아 그날의 끝자리가 5일, 10일이라면 영암읍내 오일장을 들러볼 일이다. 콩나물시루의 까만 볏짚 재에 박혀 있는 재콩나물을 숭덩숭덩 뽑아주는 아주머니를 만날 지도 모른다.     


이전 04화 못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