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하고 싶은 날

길심씨네서 (1일째)

by 전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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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해가 떴다. 집안에 아무도 없다. 나만 영암 호동 마을 길심씨네에 남았다. 길심씨의 팔순 여행을 위해 모인 가족이 모두 떠났다. 성수씨와 길심씨가 어둠이 채 물러가기도 전인 어스름 새벽에 들녘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이 진정한 시골살이의 첫째 날이다.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밥을 안치고 안방 벽 말뚝에 걸린 아버지의 옷을 가져다 마당 수돗가에서 빨래를 한다. 햇빛이 좋아, 바람이 좋아 아무것이나 모두 빨아 버리고 싶어 진다. 손빨래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적이 있었던가.


타들어갈 듯 쨍한 한여름 햇볕에 빨래는 한 시간이면 족하게 습기가 달아난다. 서울 집에 있는 모든 옷, 빨래가 생각난다. 모두 가져와 여기 수돗가에서 두 다리 뻗고 빨래 의자에 앉아 벅벅 빨아서는 빨랫줄에 졸졸이 널어 넣고 손잡고 강강술래라도 하고 싶어 진다. 여기의 햇빛과 바람과 공기를 나눠 주고 싶다. 서울 베란다 건조대에 걸려 있을 빨래들이 갑자기 측은하게 느껴진다. 마당 수돗가를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바람이 서성대니 빨래가 바람에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나도 덩달아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내 마음의 축축함도 한꺼번에 바짝 말라 뽀송뽀송해진다.

파랑 스케치북에 하양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이 잠깐 동안 가을을 불러왔나 보다. 빨랫줄 아래 장독대에 앉아 이리 멋진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니... 예전엔 집에서 떠나고만 싶어 보이지 않던 풍광이 이제야 나를 사로잡는다. 마당가에 자리한 허수아비가 나를 향해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인다. 허수아비 옷조차 벗겨서 빨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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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가 옥수수는 뜨거운 햇볕에 입을 앙다물고 이를 하나둘 채워가고 있다. 얼마 만에 느끼는 시골에서의 하루인가. 길심씨네서는 일찍 시작한 긴 하루해도 짧기만 하다. 퍼 올릴수록 얼음물처럼 시원해지는 지하수에 하루 종일 손 담그고, 발 담가 빨래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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