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 일기장

길심씨네서(2일째)

by 전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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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한 날, 길심씨의 진짜 팔순 생신날이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나의 아버지, 성수씨는 새벽에 일어나 한나절 일을 한다. 길심씨는 밭을 매고 성수씨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아 오는 논둑의 풀을 베러 갔다. 두 분에 비하면 나는 느지막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라면 새벽이다.


마당가에 서서 두 팔을 벌려 검푸르게 벌써 깨어난 월출산의 넉넉한 품에 안겨보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길심씨가 따다 둔 강낭콩을 까서 밥을 안치고, 전날 사다 놓은 소고기에 여기저기 뒤져 미역을 찾아내서는 미역국을 끓였다. 이미 2박 3일의 팔순 여행으로 거하게 생신 파티를 했으니 조촐하게 생신 상을 차렸다.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들어온 아버지는 벌써 뜨거워진 아침 햇빛을 등지고 앉아 장화를 벗는다. 나는 부엌 창문을 통해 아버지를 보며 밥을 푸고 국을 담았다. 아버지의 젖은 등을 보니 '내일 죽을 망정 허덕이는 게 인생이제.'라고 수없이 되뇌던 그의 말이 아무 말이 없어도 내 귀에 저절로 들리는 듯하다.

"느그 엄마는 뭣한디 아직도 안 온다냐? 빨리 오라고 했음 빨리 와야제. 해가 벌써 뜨거운디 큰일 날라고. 속이 없당께.'

우리의 성수씨가 은근한 타박과 걱정을 섞어 기어코 한 마디를 한다. 길심씨도 뒤이어 마당으로 들어서고 제대로 씻을 새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다.


어릴 적 어느 날처럼 셋이 아침 밥상에 둘러앉았다.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다니... 끝이 없을 줄 알았다. 성수씨가 당한 젊은 날의 교통사고와 그 후유증, 술 주사로 번쩍번쩍 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들이 많았다.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오늘의 날씨처럼 햇빛 쨍한 날의 연속이다. 무슨 일이든 나이가, 세월이 저절로 해결한다. 아직도 몰아칠 폭풍우가 남았는지 모르지만 확신하건대 이제는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만 불 것이다.


"엄마, 생신 축하드려이잉."

"아이고, 고맙네."

"아버지도 한 마디 해야지."

"아, 오늘이 당신 진짜 생일이여?"

"그으래! 그것도 모른당가? 흐흥."

"아, 생일 축하하네잉."

아버지의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에 미역국을 입에 머금은 길심씨의 입이 귀에 걸렸다. 팔순 나이에도 아버지의 따뜻한 말이 최고의 보약이고 웃음 충전제다.


설거지 후 길심씨를 찾아보니 침대에 엎드려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계부에 짤막한 일기를 쓰고 있다. 수십 년 해 온 일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현장을 목격하니 그 꾸준함에 가슴이 찡하다. 거의 매일 그날의 일을 기록한다. 어떤 때는 며칠 몰아서 쓰기도 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엔 칸이 비어 있기도 하다. 맞춤법도 틀리지만 그런들 어떠리요. 길심씨의 놀라운 기억력은 여기에서 나온다. 기록의 힘이다. 딸이 언제 왔다 갔는지? 고추밭에 농약은 언제 쳤는지? 영암 오일장에 무얼 사다 먹었는지? 논둑의 풀은 언제 베었는지? 모든 것이 적혀 있는 어머니의 기억 창고이다.


맑음

16일

본인 생일

큰딸이 미역국 끄려줌

아침에 들깨밭 맴


길심씨의 억척스러울 만큼의 부지런함과 큰 목소리에도 일기장을 보면 또 다른 그녀가 들어 있기도 하다. 일기장에는 그녀의 희로애락이 들어있고 저벅저벅 나아간 발자국이 들어있다. 오늘에야 비로소 나의 글쓰기가 그 일기장에서 나온 DNA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끄적거리는 거 말이다. 내가 억지로 꿰어 맞춘 거라 해도 어딘가에 그 줄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의미가 새롭다. 내일은 몰래 그녀의 일기장을 탐독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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