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인 척한 고냥이 Aug 13. 2023

포도 품종 : 리슬링

Riesling

리슬링은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품종이다. 포도밭과 기후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진정한 테루아(Terroir) 와인이랄까. 테루아 하면 부르고뉴(Bourgogne) 와인을 먼저 떠올리지만, 과거엔 독일의 모젤(Mosel)이나 라인가우(Rheingau) 지방의 리슬링 와인이 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은 경우도 많았다. 이외에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알자스(Alsace) 등 북부 유럽의 와인 산지들이 전통적인 리슬링 산지로 유명하다. 모두 포도 재배 북방 한계선에 가까운 서늘한 지역들이다. 원래 리슬링은 생산성이 좋은 품종이라 따뜻하고 비옥한 지역에서 재배하면 열매가 너무 많이 열려 본연의 풍미와 특유의 신맛이 모두 희석되어 버린다. 하지만 척박하고 배수가 잘 되며 일교차가 큰 서늘한 지역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햇볕이 잘 드는 경사지에 자리 잡고 늦은 가을까지 충분한 햇볕을 받으며 천천히 풍미를 완숙시켜 최고의 화이트 와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렇게 잘 익은 리슬링은 오크 숙성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따라서 리슬링은 오크 숙성을 하지 않거나, 오크의 특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오래되고 커다란 오크통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풍미의 스펙트럼 또한 넓다. 은은한 허브, 단아한 흰 꽃과 재스민, 풋풋한 청사과, 달콤한 배, 상큼한 시트러스, 농밀한 핵과, 멜론 같은 열대과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풍미가 생산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발현된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신맛과 영롱한 미네랄리티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때문에 완전히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이나 스파클링 와인부터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지는 디저트 와인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어릴 때 상큼하고 신선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은 물론 세대를 넘어서는 숙성 잠재력을 지닌 최상급 와인도 존재한다. 잘 숙성된 리슬링은 부드러운 질감과 함께 구수한 토스트와 벌꿀 같은 뉘앙스, 그리고 평론가들이 ‘페트롤(petrol)’이라고 표현하는 독특한 미네랄을 드러낸다.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과 같은 풍미다. 


리슬링의 가장 큰 미덕은 음식과의 궁합이다. 풍미의 스펙트럼이 넓고 스타일도 다양한 만큼 어떤 요리에든 곁들일 수 있다. 특히 중국, 베트남, 태국 등 향신료 풍미 가득한 요리와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첫 손에 꼽힌다. 일반적으로는 가벼운 단맛을 지닌 리슬링을 페어링 하지만, 입맛에 따라 드라이 리슬링을 선택해도 괜찮다. 깔끔한 초밥이나 생선회에도 드라이한 리슬링이 좋다. 치킨이나 피자, 족발과 같은 배달 음식과도 찰떡궁합이다. 일반적인 한식과도 무난히 어울리며, 품격 있는 파인 다이닝 코스에 페어링 할 위대한 와인들도 즐비하다.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

독일은 리슬링의 종주국 같은 나라다. 잘 만든 독일 리슬링은 지극히 섬세하고 우아하며 견고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13개의 공인 와인 생산 지역 중 특히 모젤과 라인가우, 라인헤센(Rheinhessen), 나에(Nahe) 등에서 위대한 리슬링 와인이 많이 나온다. 꼬불꼬불하게 흐르는 모젤 강 주위의 점판암과 편암으로 뒤덮인 경사지에 위치한 특급 밭에서 나오는 섬세하고 영롱한 리슬링은 보물 중의 보물이다. 마을마다, 포도밭마다 같은 리슬링 품종으로 제각각 다른 성격의 와인을 만드는 경이로운 지역이다. 라인가우 와인은 우아하고 밸런스가 좋은 것으로 명성이 높다. 나에는 모젤의 섬세함과 라인가우의 우아함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인헤센은 부드럽고 편안한 가성비 와인의 주요 생산지다. 


독일 리슬링을 즐기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관문이 하나 있는데 바로 레이블 읽기다. 독일 와인 레이블은 방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독일어 자체가 길고 발음하기 어려워 더욱 난해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규정과 원리만 알면 의외로 재미있다. 상세한 얘기는 별도로 잘 정리된 기사를 참고하고, 여기서는 꼭 알아야 할 사항만 짚고 넘어가자. 일단 독일 와인은 도이처 바인(Deutcher Wein)-란트바인(Landwein)-크발리테츠바인(Qualitätswein)-프래디카츠바인(Prädikatswein) 등 네 가지 등급으로 나뉜다. 이 중 도이처 바인과 란트바인은 전체 와인 생산량의 10%를 넘지 않으며 한국에서 잘 보이지도 않으므로 염두에 두지 않아도 좋다. 크발리테츠바인은 퀄리티 와인이라는 뜻으로 지정된 공인된 13개의 광역 생산지 중 한 곳에서 생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이 카테고리에는 기본 품질을 갖춘, 쉽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가성비 와인이 많다. 일반적으로 아무 표시가 없는 크발리테츠바인은 적당한 단맛과 균형 잡힌 신맛을 지닌 파인헤릅(feinherb)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드라이한 경우 트로켄(Trocken)이라고 표기한다. 프래디카츠바인은 수확한 포도의 당도에 따라 다시 카비넷(Kabinett)-스패트레제(Spätlese)-아우스레제(Auslese)-베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 BA)-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 TBA) 등으로 구분한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단맛이 농축된 귀부균의 영향을 받지 않은 포도를 규정에 맞게 언 상태로 수확해 만들면 아이스바인(Eiswein)이다. 베렌아우스레제와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는 귀부균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풍미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위 등급이 반드시 완성 와인의 당도를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등급은 포도 자체의 당도를 기준으로 나뉘며, 최종 완성된 와인의 당도는 생산자가 어떻게 양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해당 단계에 걸맞은 당도를 지니고 있다. 카비넷과 스패트레제의 경우 무난한 단맛을 지닌 경우가 대부분이며, 당도가 낮을 경우 보통 트로켄, 파인헤릅 등으로 표시한다. 아우스레제는 보통 디저트 와인에 가까운 강한 단맛이다. 베렌아우스레제 이상은 대부분 농밀한 디저트 와인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다. 


최근 드라이 와인 생산이 확대되고 지리적 표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경향에 맞추어 독일 와인법도 변화하고 있다. 2021년 1월부터 시행된 새로운 독일 와인법은 크발리테츠바인 이상 등급 체계를 지방(Anbaugebiet)-지역(Region)-마을(Ort)-포도밭(Lage)으로 구분한다. 이는 EU의 와인법과도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훨씬 이해하기 쉽다. 지방 와인은 기존 크발리테츠바인과 유사하게 13개 공인 생산지에서 생산한 와인이다. 지역 와인은 조금 더 한정된 지역에서 생산한 와인인데, 이전의 베라이히(Bereich) 혹은 그로스라게(Grosslage)와 유사하다. 마을 와인은 부르고뉴의 빌라주 와인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포도밭 와인은 다시 아인첼라게(Einzellage)-에어스테스 게벡스(Erstes Gewächs)-그로세스 게벡스(Grosses Gewächs)로 구분한다. 이 역시 일반 포도밭-프르미에 크뤼-그랑 크뤼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중 그로세스 게벡스와 에어스테스 게벡스는 반드시 드라이 와인이어야 한다. 이전부터 그로세스 게벡스의 이니셜인 GG는 고품질 드라이 와인의 표기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새로운 와인법은 위에서 설명한 포도의 당도 기준 등급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등급과 공존한다. 사실 이 법이 발효되기 이전부터 독일우수생산자협회(Verband deutscher Prädikatsweingüter, VDP)에서 구츠바인(Gutswein) - 오르츠바인(Ortwein) - 에어스테 라게(Erste Lage) - 그로세스 라게(Grosses Lage)로 구성된 자체 등급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등급 체계가 독일 와인 전체로 확대 적용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법은 점진적으로 적용돼 2026년부터 구속력을 갖는다니 앞으로 독일 와인 레이블이 어떻게 변화될지 주목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레이블에 생산자 명과 파인헤릅 등의 당도 표기 외에 특별한 등급 명칭이 적혀 있지 않으면 보통 크발리테츠바인이다. 카비넷부터 아이스바인까지의 등급 표시가 적혀 있으면 프래디카츠바인이며, GG 표시가 있으면 고품질 드라이 와인이다. 이와 함께 '마을 이름er + 밭 이름'이 병기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래 소개할 '폴렌바이더 볼퍼 골드그루베 리슬링 슈페트레제(Vollenweider Wolfer Goldgrube Riesling Spätlese) 같은 경우인데, 폴렌바이더라는 생산자가 모젤 지방 '볼프(Wolf) 마을의 골드그루베 포도밭에서 재배한 리슬링으로 만든 스패트레제 등급의 와인'이라는 뜻이다. 


독일의 이웃나라 오스트리아의 리슬링도 상당히 뛰어나다. 특히 수도 빈의 북서쪽에 위치한 도나우 강가의 가파른 경사지에서 생산되는 리슬링은 독일 모젤 리슬링의 날 선 신맛과 프랑스 알자스 리슬링의 견고한 구조감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바카우(Wachau), 크렘스탈(Kremstal), 캄프탈(Kamptal), 트라이젠탈(Traisental) 등이 대표적인 산지다. 오스트리아도 독일과 유사한 포도의 당도 기준 등급 체계가 있다. 하지만 바카우 지역의 경우 별도의 드라이 와인 분류 체계도 갖추고 있다. 슈타인페더(Steinfeder)는 알코올 11.5% 이하의 가장 가벼운 와인이며, 페더슈피엘(Federspiel)은 알코올 11.5%에서 12.5% 사이다. 스마라그드(Smaragd)는 알코올 12.5% 이상의 가장 강건하고 묵직한 와인이다. 슈타인페더와 페더슈피엘은 어릴 때 신선하게 마시는 게 좋으며, 스마라그드는 최소 5년 이상 숙성해야 그 잠재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다. 



알자스와 기타 유럽 지역

알자스 리슬링은 견고한 구조감이 일품이며 드라이한 경우가 많다. 다만 방당주 타르디브(Vendange Tardive)와 셀렉시옹 드 그랑 노블(Sélection de Grains Nobles) 같이 늦수확한 포도나 귀부균의 영향을 받은 포도를 선별해 만드는 스위트 와인은 예외다. 리슬링은 알자스의 네 가지 귀족 품종*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힌다. 특히 그랑 크뤼 포도밭에서 생산한 와인은 섬세한 향기와 복합적인 풍미를 갖추었으며 숙성 잠재력 또한 뛰어나다.  이외에 이탈리아는 북동부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Friuli- Venezia Giulia),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Trentino-Alto Adige) 등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리슬링을 생산하며 헝가리,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등에서도 리슬링을 재배한다. 주의할 점은 이들 지역에서 종종 보이는 벨쉬리슬링(Welschriesling)은 리슬링 품종과 유전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스페인은 전통적인 리슬링 재배지는 아니지만, 좋은 의미를 담은 양질의 리슬링이 있어 함께 소개한다.

*알자스의 네 가지 귀족 품종: 리슬링, 피노 그리(Pinot Gris), 뮈스카(Muscat), 게부르츠트라미너(Gewurztraminer)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

리슬링은 1990년대 샤르도네(Chardonnay)에게 왕좌를 빼앗기기 전까지 호주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화이트 품종이었다. 지금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피노 그리에게도 추월당해 4위에 머물러 있지만, 그 품질만큼은 여전하다. 호주 리슬링은 대부분 드라이하며, 둥글고 편안한 질감을 보인다. 초기에는 신선한 시트러스 풍미, 숙성된 후에는 은은한 토스티 힌트와 페트롤 뉘앙스를 매력적으로 드러낸다. 뛰어난 와인들은 주로 남호주의 서늘한 지역인 이든 밸리(Eden Valley)와 클레어 밸리(Clare Valley)에서 나오며, 빅토리아(Victoria)와 뉴 사우스 웨일스(New South Wales), 서호주 일부 지역에서도 맛있는 리슬링을 생산한다. 


뉴질랜드에 리슬링이 식재된 것은 1970년대로, 초기에는 말보로(Marlborough)와 넬슨(Nelson) 지역의 서늘한 지역의 늦수확한 포도로 달콤한 와인을 생산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드라이한 와인도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서늘한 기후를 바탕으로 뉴질랜드 피노 누아의 메카로 떠오른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는 테루아 중심의 리슬링 와인 산지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미국

북쪽에 위치한 뉴욕주, 그리고 워싱턴주에서는 리슬링 품종으로 빼어난 아이스와인(Icewine)을 생산한다. 캘리포니아 북부의 서늘한 지역에서도 적은 양이지만 보트리티스의 영향을 받은 디저트 와인을 만들고 있다. 한국에 수입되는 경우가 많지 않아 아쉽다. 그렇지만 향긋한 꽃향기와 영롱한 미네랄, 진한 과일 풍미를 지닌 가볍고 상쾌한 드라이 혹은 오프 드라이 리슬링은 제법 찾을 수 있다. 특히 퀄리티 리슬링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은 워싱턴주다. 샤토 생 미셀(Chateau Ste. Michelle)과 같은 대형 생산자가 가성비 리슬링을 생산함과 동시에, 독일의 유력 생산자인 닥터 루젠(Dr. Loosen)과 함께 프리미엄 리슬링 또한 생산하고 있다. 서늘한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 등에서도 양질의 리슬링이 나온다. 전반적으로 미국의 리슬링은 산미가 비교적 낮고 과일 풍미가 풍부해 편하게 즐길 만한 스타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포도 품종: 소비뇽 블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