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그에게 연락이 왔다. 그날 밤 나를 본 게 분명했다.
그는 알아도 모르는 척 어물쩍 대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아니 어쩌면 번호가 뜬 순간 알았을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도 사라지지 않는 나의 신묘한 능력. 나는 언제 어디서든 그를 알아볼 수 있다.
"한 번 보자. 되는 시간 알려 줘. 나는 다 괜찮아"
나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만났다. 헤어지고 처음으로 단 둘이. 테이블이 몇 개 없는 어두운 위스키 바에서.
밥을 먹을까 했지만 그러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가 보였다. 구석 바에 앉아있는 익숙한 뒷모습. 검은색 셔츠를 입은 넓은 어깨의 저 남자.
“안녕!"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했다.
"어머, 멋있어졌네?"
어색하면 목소리 톤이 더 높아진다.
“하하. 아니. 어서 와"
"뭐 좀 마셔. 여기요"
"같은 걸로 주세요"
"나 사실 오빠 봤어"
"응. 알고 있어"
"... 어떻게 알았어?"
"아무튼 너는 티가 너무 나"
".... 창피하다. 그냥 궁금해서"
"그럴 수 있지. 내가 너네 집 근처니까"
....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쓰디쓴 위스키를 홀짝이며.
....
“그나저나 축하해.”
“뭘. 너는? ”
“나야 뭐 똑같지"
…
"회사는 그만뒀어?"
"아니, 회사 다니면서 가게 하는 거야"
"...?"
"어차피 영업이니까. 아는 사람만 알고. 가게야 저녁에 여니까"
"안 힘들어?"
"힘들어"
"잠은?"
"거의 가게에서 자. 하하. 그래서 꼬질꼬질해"
'그래서 살이 빠졌구나...' 왜 쓸데없이 속상한 걸까'
"안 꼬질꼬질해. 많이 홀죽해 졌다. 밥 좀 먹어"
"먹어. 열심히 해야지"
....
다시 침묵
...
"근데 가게는 왜 차린 거야?"
"돈 벌어야지... 투자받았어"
"투자? 누구? 아, 나 너무 캐묻나."
"하하, 아니야. 물어봐도 돼. 뭐든. 그때 그 사장님. 거래처"
"아... 그분...!"
예전에 그가 종종 돈을 빌리던 사람.
"이번에는 아예 많이 빌렸구나. 큭큭"
"아... 그런 셈이지.."
"참나 ㅋㅋ"
웃었다. 시간은 참 신기하다. 이제 이런 이야기도 웃으며 할 수 있다는 게.
잠시 말없이 위스키만 홀짝였다. 애꿎은 잔을 만지작 거리며.
....
“만나는 사람은 없고...?” 그가 물었다.
“음... 없어. 썸 몇 번. 오빤?”
“... 나도”
“누구?”
“하하, 누구긴 누구야. 너 모르는 사람”
“지금은…?
“연애는. 먹고살기 바빠”
“그래,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열심히 일해! 부자 돼야지!”
“하하, 참나.
우리는 또 한 번 웃었다. 크게 소리 내어. 그의 오른쪽 보조개가 움푹 들어갔다.
묘하게 안심이 됐다. 그의 그의 웃음소리.
"… 나 안 보고 싶었어?"
그가 물었다.
"하하, 아니야"
"가끔. 가끔 보고 싶었지"
가끔이긴. 보고 싶어서 그의 가게 주변을 빙빙 돈 주제에.
"나 가게, 너 때문에 한 거야"
"… 응?"
"가게 말이야, 너 때문에 낸 거라고"
"... 오빠가 하고 싶어 하던 거니까 냈겠지"
그래, 듣고 싶었던 말. 어색하면 딴 소리를 하는 나의 버릇.
사실 그 이후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던 스무 살 포차에서 처럼 기억이 없다. 정확한 건, 우리가 그날 술을 꽤 많이 마셨다는 것. 술찌질이인 둘이 독주를 연거푸 마셨으니.
"으아.. 취한다..."
"가자. 데려다줄게"
데려다주겠다는 그를 애써 거절하지 않았다.
둘 다 벌게진 얼굴로 돌아가는 길. 그렇게 뚜벅뚜벅 걸었다. 여기서 돌다리를 건너면 얼마 안 가 우리 집이 나온다. 먼 길을 돌아가지 않고 바로 질러 올 수 있는 길.
알딸딸했다. 술기운이 가득했지만 나는 그와 애써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다.
“옛날 생각나네. 여기 많이 걸었는데”
“그러게”
.....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손등이 나의 손등을 살짝 스쳤다.
나는 이내 뒷짐을 졌다.
어색한 분위기
“가게 일은 안 힘들어? 회사 일이랑 같이 어떻게 해”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힘들어. 엄청. 근데 그냥 해야지 어떻게 해. 빚도 많은데. 그래도 단골도 많이 생겼어”
“어, 그런 거 같더라. 잘됐지 뭐야. 돈 바짝 모아.”
“... 그래야지”
다시 침묵. 왜 자꾸 돈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그는 내가 돈 때문에 자기와 헤어졌다고 생각할까?
자기가 가난해서. 나 역시 가난해서.
서로의 가난을 견디지 못해서. 둘 다 서로의 구원이 아니라서.
“잠깐만 앉았다 갈까?”그가 말했다.
“... 응”
우린 탄천 옆 벤치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만나면서 자주 왔던 곳이다.
“별이 많다….”
"별, 맞아. 그때도 별 이야기를 했었지."
별 따위를 이야기할 만큼 순수했던 그 시절..
“.... 나, 너 안 미워해”
“...? 하하. 뭐야, 갑자기~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지 마라”
진지한 분위기가 싫다.
감정 처리가 서툰 사람은 이런 분위기가 쥐약이다.
“정말이야. 나 너, 원망한 적 없어”
가만히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20대를 함께 보낸 첫사랑을 버렸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그를, 누구보다 내가 필요했던 그를.
“... 미안했어. 나는 미안했어"
"..."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난 그 시선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근데 우리 왜 헤어진 거야...? 나 아직도 몰라”
아아, 우린 왜 헤어졌을까, 도대체 우린 왜 헤어졌던 걸까.
“그게 뭐 중요한가. 다 지난 일인데”
"지났으니까 말해줘. 나 그 정도는 알아도 되지 않아?”
“…”
”너 지금 행복해? 우리가 헤어진 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그 사람이 없는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일까?
살면서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과연 몇 번이었을까.
만약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때 그가 날 더 세게 붙잡았다면, 지금의 우린 어땠을까?
그 사람과 헤어지면 모든 게 변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