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그 해 우리는
어색했던 그 날밤 이후 우리는 몇 번을 더 만났다.
저녁 먹을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주말에 놀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그는 나를 열심히 불러냈다.
하루는 그의 알바가 갑자기 펑크를 냈다고 일까지 도와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애써 그와 거리를 두었다.
“뭐 해? 퇴근했어?”
“아직. 오늘 일이 좀 남아서”
“아아. 그래, 수고하고!”
"뭐야, 그 말하려고 연락했어?"
"아니, 저녁이나 먹을까 했지"
"아아, 오늘은 힘들겠다. 미안, 담에 먹자"
“그래!”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그의 가게를 피해 빙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뒤 그는 서촌에 다른 가게를 낸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와, 이제 자주 못 보겠네!”
“응, 아마도. 여기는 매니저가 있으니까. 그래도 자주 놀러 와. 친구들이랑”
“응, 그럴게. 축하해!”
나는 그가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껏 가게 앞을 지나다녔다. 버스를 타러 나갈 때도, 동네를 산책할 때도.
그리고 1년 뒤.
"잘 지내?" 그였다.
"우아, 오랜만!"
"시간 될 때 볼까?”
"응, 주말에 보자”
이유는 묻지 않았다. 왜 보자고 했는지 알 것만 같아서.
“얼굴 좋아졌네? 무슨 좋은 일 있어?”
“나 내려가. 부산으로”
“갑자기 왜?”
“…. 아... 혹시?”
“응. 여자친구랑 내려가”
"악!! 뭐야, 축하해!!! 결혼해?"
"당장은 아니고..."
"대에에에에에박. 너무 잘 됐다. 정말..."
“하하, 고마워…" 그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오른쪽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근데 누구셔?”
“… 전에 가게에서 일하던 친구”
예전에 그의 가게를 도와주러 갔을 때다. 알바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피부가 하얗다 못해 뽀얗고 볼에 젖살이 가득한. 앳되고 예쁜. 아름답고 보송보송한.
난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건 여자의 직감이었다.
"너무 잘 됐다. 너무 잘됐어"
진심이었다. 나는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늘 웃었으면 했다. 기쁘고 좋은 일만 있었으면. 그는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행복해야 한다.
그는 쑥스러운 지 얼굴을 숙였다. 아마도 예의라고 생각했겠지. 직접 말하는 게.
“나중에 놀러 와.”
“하하. 안 가. 절대”
“푸하. 그래 절대 안 오겠지. 너도 빨리 해. 결혼”
“뭐어래. 난 아마, 못할 거야”
“왜. 할 수 있어”
“아 남이사! 오빠나 잘 살아. 나도 잘 살게. 큭큭”
우린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눴다. 마음껏 웃으며. 잠시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나에게 친구였고 연인이었고 오빠였고 아빠였던 순간으로.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어둠을 밀어낼 수 있었던 그때로. 이십 대의 나로.
사뭇 그에게 감사하다. 내가 제일 연약했던 시절 그가 나와 함께 있어주었으니. 동시에 미안하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였던 만큼 가장 부서지기 쉬운 순간들이었으니. 그 기간의 균열들이 퍼지고 퍼져 모두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만큼 그도 아팠겠지. 우리는 함께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깨지고 다시 붙고 찢어지고 부풀기를 반복하며 자라고 또 자랐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꿈같다. 모두 귀하고 감사하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다, 이 사람. 나 없이도 행복해서.
그의 길이 꽃길이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쭈욱.
영화 <먼 훗날 우리>에서는 가난한 두 남녀 젠칭과 샤오샤오가 나온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 베이징으로 상경한 남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랑을 싹 틔운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헤어진다. 그 사이 젠칭은 크게 성공했고 후에 둘은 우연히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만난다. 갑작스런 기류변화로 비행기는 최소되고 둘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 미스 유’ 샤오샤오가 말한다.
‘나도 보고 싶었어’ 대답하는 젠칭.
‘아니, 내 말은 내가 널 놓쳤다고’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다시 만났다면...
사실 나도 내가 그와 왜 헤어졌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와 왜 헤어진 걸까. 그와 재회했을 때, 그가 나를 잡았을 때. 나는 왜 돌아가지 않았던 걸까.
어떤 것들은 지나간 후에야 그 의미를 알 게 된다.
나에겐 그가 그렇다. 모두의 첫사랑이 그런 것처럼. 나는 그와의 사랑을 그냥 아름답게 남겨두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에 때 묻지 않게.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지긋지긋한 끝사랑이 아닌 아련하게 빛나는 첫사랑으로.
이제와 생각하면 그와의 만남도 헤어짐도 모두 나의 인생에서 겪어야만 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반드시 겪어내야만 했던. 그 사람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기쁘고 또 불행했던 가까이서 보면 희극, 멀리서 보면 비극이었던 수많은 정의할 수 없는 순간들을.
그와 헤어지고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내가 곧 그였고 그 역시 나였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토록 그를 사랑하면서 또 미워했었다는 것을. 나는 정말 벗어나야 했던 게 아닐까. 그때의 나에게서. 그때의 그에게서.
그와 헤어진 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미워하고 사랑했던 그도 사랑 그 자체도 아닌 나 자신이었는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나를, 멍청하고 바보 같은 나를 부정하고 미워하며 온갖 복잡한 감정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영하고 원망했던 것을.
그래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됐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있는 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도 썩 괜찮은 사람이라란 것 말이다. 끊임없이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지 않아도,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사람이란 것을.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편하다.
서툴지만 나에 대한 애정도 조금씩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는 나를 응원해 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뭐든지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매일매일 다짐하며.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것. 우리 모두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무엇보다 모든 사랑의 처음과 끝은 나를 사랑해주는 것에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잘 가, 소중했던 나의 첫사랑, 나의 젊은 시절.
사랑했었어. 정말.
"그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래도 언젠간 헤어졌을 걸"
"네가 끝까지 내 곁에서 지켰다면?"
"네가 성공 못했을 걸"
"이도 저도 안 따졌다면 결혼하지 않았을까?"
"진작에 이혼했겠지"
"돈이 많아서 큰 소파가 있는 커다란 집에 살았다면?"
"네가 끊임없이 바람피웠겠지"
"모두 네가 원한대로 됐다면?"
"결국 다 가졌겠지. 서로만 빼고"
- 먼 훗날 우리의 대사 중 -
사진: sbs 드라마 <그 해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