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번은 무너졌어야 하는 신념
최우등 졸업이었으면 더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울대학교를 우등 졸업했다. 어느 학점 이상이면 우등 졸업을 하는 거라 나와 같은 우등 졸업생이 많았을 테지만 하여튼 나는 많은 보통의 수험생들이 꿈꾸는 국내 명문대를 우등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라는 그 말, 딱히 공감하고 싶지도 않고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성적과 행복은 애매한 관계이다. 성적이 다라고 믿는 그 순간에는 성적을 잘 받는 게 행복하고, 그게 아닌 걸 깨닫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세상 다른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특별한 것 없는 것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공부가 다가 아니라는 말은 보통 인성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쓰는 말이지만, 인성은 당연한 거니까 그렇다 치고,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다시 말해 성적을 잘 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아'를 찾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아마 현상으로 따지자면 나와 같은 사람들도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유독 더 피해의식을 느끼는 건 탄탄대로를 기대하는 그 믿음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자아가 없는 삶을 살다 보면 그간 쌓아온 믿음이 무너지는 때가 오게 마련이다. 괴로워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서울대학교에는 천재가 많았다. 천재적인 '모먼트'도 아니고 천재 '같은' 사람도 아니고 그냥 천재가 많았다. 운이 좋아 들어간 나와는 다르게 확실하게 인재이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열등감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비벼볼 만해야 열등감을 느낄 텐데, 그냥 쟤는 저렇게 태어났나 보다 싶을 정도로 본인의 전공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도 많았고, 할 말을 잃게 할 만큼 머리가 비상한 사람도 많았다.
어느샌가 느껴지는 건, ‘공부를 잘한다', ‘똑똑하다’는 말에 그들과 내가 똑같이 묶이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공부가 그 공부가 아니었다. 똑똑하다고 해서 똑같이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나도 공부를 곧잘 했지만, 성적을 위한 공부를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저 타인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잘 맞춰서 해냈다는 걸 의미할 따름이었다(한참 뒤에는 그 능력도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을 깨닫긴 했다).
서울대학교를 다니면서 즐거웠던 건 사실이다. 운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일정 부분은 내가 노력해서 해낸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부심도 느꼈다. 주변에 대단한 친구들, 훌륭한 친구들이 많았다. 더 이상 자유를 찾고 싶지 않을 만큼 즐거운 대학생활을 했다. 그래 봤자 밤늦게 술을 마시는 정도가 다였지만,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동아리, 학회, 대외활동, 공모전, 봉사활동,... 모든 활동을 최선을 다해 해냈다. 굳이 다른 스펙을 채워 넣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때는 그렇게 현재를 착실하게 살면 미래는 착착 설계되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 아래 살고 있었지만, '내 미래는 창창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 내가 직접 미래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졸업을 하고서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왜 해야 할지, 어떻게 그걸 해낼지에 대해 한 번도 똑바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몰랐다. 줄곧 남에게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엄마가 그랬잖아. 좋은 대학교 가면 잘 살 수 있다고."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좋은 대학교 가면 다 끝나는 거라고."
난 누구의 꿈을 대신 꾸고 있었던 거지?
고시를 보라는 아빠의 말은 거절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부모님은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서울대 가면 인생이 달라진다더라, 고시를 보면 된다더라 하는 말을 전해줄 뿐 내가 싫다는 것을 강요하는 분들은 아니었다). 근데 그 대신 뭘 해야 할지는 도대체가 알 수 없었다. 휩쓸리듯 떠밀리듯 취업을 했다. 직장인이 되었다는 것은 뭔가 길이 정해져 버린 느낌이었다. ‘이제 진짜 너 알아서 하셈ㅋ’ 하고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원하는 게 생기면 그걸 할 수 있는 건 맞는지 아득해졌다.
차라리 멋모르던 시절의 어린 나는 굳은 믿음 아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기라도 했다.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난 나는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도 모르는, 아직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바보였다. 이제야 시작이었다.
사회로 나갔을 때, 다시 말해, 내가 모범생으로 살아온 결과물이 나올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다 필요 없고 이제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의문이 들었다.
'이게 내가 원했던 건가?'
나쁘다고 이야기할 순 없지만 원했던 건 아니었다. 갑자기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내가 원하는 게 뭐였지? 아니, 애초에 원한 게 있긴 했나? 뭔데! 나 누군데?!'
언젠가 한 번은 무너졌어야 할 신념이, 드디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