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솜 May 23. 2024

제사 - 2

한재 이목(1471~1498)

나는 한재 이목(1471~1498)의 17대손이다.    

사료를 바탕으로 한재 이목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한재 이목(1471~1498)은 지금의 김포 통진에서 태어나셨다. 당대 유학자의 대부였던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문인이 되셨다. 충직한 성품과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절개와 늠름한 기품, 도학의 기틀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다져졌다고 할 수 있다. 동문으로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등은 지금도 유학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19세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셨다. 20세 성균관 태학생으로 있는 동안 곧은 절개와 정의를 실천하는데 앞장서서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연산군 5년 대과에 급제하여 26세에는 영안남도 병마평사에 전임되었다. 돌아와 독서당에 녹선 되어 사가독서의 영예를 입었다.   

   

그러나 무오년 동문인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일이 발단되어 동문들과 함께 참화를 입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조선 4대 사화 중 가장 먼저 일어난 무오사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얼굴빛이 조금도 변치 않았으며 의연하게 절명가를 지어 불렀다고 전해진다. 당시 나이 28세의 일기로 처형되셨다. 더욱이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의 추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연산군이 축출되고 중종이 등극하여 할아버지의 억울했던 죄가 벗겨져 관직에 복직되고 가산도 환급받았다고 한다. 명종 14년에는 공주 공암에 있는 충현서원에 배향되었다. 경종 2년 시호가 내려졌는데 “굴하지 않고 숨김이 없음을 ‘정(貞)’이라 하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라고 하여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김포에 사우(祠宇)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곳이 현재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한재당’이다.      


한재당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의 고향은 공주다. 15세기말부터 우리 조상은 공주에 사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금강 건너 마티고개 넘어 산골짜기에서 태어나셨다. 무오사화 이후 이목 할아버지의 자손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농토가 부족하여 먹을 것조차 풍족하지 않은 산간 마을이다. 금강을 따라 교류가 활발하고 발전된 지역도 있었을 텐데 아버지 고향은 400년을 어떠한 발전도 없었던 듯이 낙후된 곳이다. 


이렇다할 특산물 하나 없이 가난하였지만 이목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50여 년 전까지도 마을에는 흰 도포를 입고 갓을 쓰신 집안 어른이 계셨다. 농사를 짓지 않고 글 읽으셨다. 사람들은 집안의 일을 보고하고 의논하였다. 유학자였다. 


아버지는 도시로 나와 신식 공부를 하고 선생님이 되셨다.  아버지는 평생을 한재 이목선생의 선양사업에 힘쓰셨다. 김포에 있는 사당과 애기봉에 있는 묘역을 정비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셨다. 이목할아버지의 문집을 발간하여 해외교류가 힘든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의 유명 도서관으로 보내는 일을 하시기도 하였다.           



유교는 공자의 사상을 믿고 따르는 학문으로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문화권의 생활윤리로 자리매김하였다. 유교는 자기를 완성하여 남에게 덕행을 미치도록 군자가 되는 것이 핵심이다. 자신의 몸가짐을 삼가고 가문을 중히 여기고 청렴한 생활을 지향했으며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발전하였다. 성리학을 근본이념으로 세워진 조선은 초기 왕권과 사대부 간의 권력다툼, 훈구와 사림의 갈등 등이 심했다. 이목 할아버지는 이러한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혈기 왕성한 젊은이로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화를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교사상의 중심에는 효가 자리하고 있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던 조상은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교훈이 된다.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은 항상 조상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젊은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목 할아버지는 어느 날 종로를 지나는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윤필상의 가마가 지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우리 할아버지는 길 가운데 연(영의정이 탄 가마)을 가로막고 영의정에게 정치를 잘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가 지나 가는데 서울대 다니는 학생이 정치 잘하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쨌든 옳고 그르고를 떠나 기개 높은 젊은이였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왜곡되고 와전되기도 하여 자손들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거 같다. 언니가 결혼하기 위해 집안의 어른에게 보고하였을 때 우리 집안이랑 윤 씨 집안이랑은 맞지 않는다고 파평 윤 씨 신랑감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황당한 조상님 사랑이다.           


아버지는 집안일과 종친 일을 보셔서 공주와 김포를 수시로 다니셨다. 나도 결혼 전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김포에 갔었다. 시제를 지내는 애기봉까지 따라간 적도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통진은 더 멀었다.  전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 전철에서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탔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돈이 나오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이목 할아버지의 뜻을 전했다. 사당의 정비를 위해 어디에 정자를 앉힐 것인지 어디에 나무를 더 심을 것인지 문중 사람들과 의논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목 할아버지의 문장 실력은 상당하셨다고 한다. 28세에 돌아가셨지만 지금 남아 있는 자료로도 학위논문이 몇 편 나와 있다. 특히 차에 대한 글인 ‘다부’는 정신적 깊이가 깊어 유학사상과 노장사상 신선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초의선사의 동다송과 견줄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초의선사보다 300년 앞선 유학자의 글을 높이 사서 차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목 할아버지를 기리고 있다. 김포 사당에는 차나무를 키우고 사당 인근에는 차 박물관도 있다.      


아버지는 조상의 힘으로 평생을 사셨다. 세파에 굴복하지 않으셨던 조상님은 아버지의 자부심이었다. 아버지는 조상님의 정신을 꼿꼿이 이어 오셨지만 형식을 무조건 따르지는 않으셨다. 제사의 불합리한 면을 개선하는데 주저하지 않으셨다. 가정의례준칙이 선포되었을 때 가장 먼저 뜻은 지키되 형식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셨다. 제사의 횟수를 대폭 줄이고 음식도 간소화하는데 적극적이셨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신을 돌보고 가정을 돌보고 나라를 다스려야 평천하를 이룬다는 유교의 이념을 새기며 평생을 사셨다. 




나는 제사에 있어 형식보다는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 제사 -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