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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노무사 Sep 08. 2021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먹고사는데


영화는 영화다


2019년 하반기,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저는 당시 노무사 시험공부를 하고 있기도 했고, 책을 이미 읽었기 때문에 영화 볼 생각은 못 했습니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걸어 내려오는 길에 어쩌다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82년생 김지영> 봤어요. 진짜 엄마들이 너무 힘들더라구요.”
“선생님은 뭐든 잘할 것 같아요. 악다구니가 있잖아요.”     


 제가 대학원 다니면서 시험공부도 하고, 육아도 병행하며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을 아시는 선생님들께서 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셨습니다. 당시에 악다구니의 뜻을 몰라서, 네이버에 검색했더니 이런 뜻이었어요.   

           


 위로가 되지 않고, 약간 기분이 상했습니다. 저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 성장하는 삶을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뿐인데 왜 기를 써서 다투며 욕설하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던 것일까요. 분명 선생님은 저를 위로하고 지지해 주시려는 뜻이었을 겁니다. 악다구니의 뜻을 잘 모르시는 분일 수도 있겠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신경 쓰이는 부분인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나는 그냥 꿈이 있는 평범한 사람인데, 다른 사람에게 저는 '악다구니 있는 엄마' '힘든 워킹맘' '치열한 사람' 등으로 보이나 봅니다. 워킹맘은 하나의 정보만으로 오해를 받기 쉽습니다. 아이가 있다면 애엄마라서 이렇겠지, 여자 공인노무사라면 아 여노무사라 이렇겠지. 편견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최대한 제 사생활을 이야기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여성의 돌봄 노동과 경력단절은 주변의 공감이 필요한 문제일 뿐 아니라, 해결되어야 하는 사회문제입니다.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면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겠죠. 영화는 영화일 뿐입니다. 육아에 적극적인 공유같은 남편을 두지 않은 여성에게 현실은 더욱 가혹합니다. 공감과 위로보다 무관심이 차라리 덜 아플 때가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


 올해 초 신랑이 다시 원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서울로 발령을 받은 지 딱 1년 6개월 만이었습니다. 대학원 졸업까지 만이라도 서울에서 근무하기를 바랐는데, 작은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당시 노무법인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아로 인한 배려를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퇴근할 때 산더미 같은 일을 가지고 집에 와서 아이를 재운 후 새벽 1-2시까지 일을 했습니다. 피곤하니 매일 우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피곤한 상태에서 일을 잘했을 리도 없었습니다. 


 공부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부정적인 감정이 몰려왔습니다. 특히 아이를 재운 평일 밤 가장 우울했습니다. 스스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은 이 나이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는데, 저는 다시 신입사원이 되었고, 부모님이 집에 가시면 육아는 온전히 제 몫이었으니까요. 6시 반에 일어나서 아이 아침을 준비하고, 지각할까 봐 늘 달려야 했습니다. 눈치 보며 퇴근해서 집에 와도 아이와 온전히 놀아줄 수 있는 시간은 1시간뿐이었습니다. 아이가 일찍 자지 않으면 아이에게 협박하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아이가 늦게 일어나면 저는 또 지각하고 눈치 보고의 반복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남들이 전문직이라 부럽다고 해도, 전 매우 불행했어요. 일을 끝내고 마시는 맥주 한 잔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면 또 스스로 불쌍해서 우울해졌습니다. 


 여섯 살 딸 지솔이는 싸움 놀이를 좋아합니다. 놀이라고는 하지만 아빠를 때리는 게 주된 목적이죠. 신랑의 오버스러운 아픈 연기가 재밌나 봅니다. 오늘도 놀이를 가장한 폭행에 신랑이 지솔이를 말렸습니다.


“지솔아 아빠 그만 때려. 아빠 불쌍한 사람이야”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먹고사는데!”


 지솔이 한마디에 웃음이 났습니다. 불쌍하다는 뜻을 저는 잊었었나 봅니다. 먹고살 만한 저는 절대 불쌍하지 않습니다. 저는 82년생도 아니고, 김지영도 아닙니다. 저는 힘들고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도 싫고, 대단하고 억척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싫습니다. 저는 아이 엄마이지만 여전히 꿈꾸고 있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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