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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론토 케빈 May 16. 2024

프롤로그. “너 캐나다 가면 무슨일 하고 살 거야?"

이 질문에 답을 못 내리고 시작한 해외살이. 나도 내가 뭐가 될지 궁금해


캐나다에 가겠다는 선언 후 가족이나 친구, 지인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이 가서 뭐 하고 살 거냐는 말이다. 정확히는 무슨 직업을 갖고 어떻게 돈을 벌어 사람 구실하면서 살건지 의구심을 담은 의도가 다분했겠지만. 그때마다 나에 대답은 한결같았다. 

“여기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야. 우선 가서 지내보고 거기에 맞춰서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굳어 있기 일쑤였다. 지금 돌아봐도 한국사람들에게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대답이긴 했다. 외국에 나가서 산다고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경우의 수를 모두 따져가며 성실하게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테니. 심지어 도착도 하기 전에 미리 직장을 구하던지 아니면 그 나라에 가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각종 기술을 사전에 섭렵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 무작정 왔다. 심지어 판데믹의 한가운데. 캐나다는 한국과 달리 사회 전반에서 락다운이 진행되고 있었다. 공공기관은 문을 닫았고 대다수의 음식점이나 상점들도 영업을 안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겐 선택의 폭이 넓진 않았다. 이 나라에서 일한 경력은 없고 영어는 못하는 30대. 내가 사장이라도 나 같은 사람은 채용하지 않을 테다. 그나마 그로서리 마트는 필수 시설로 분류되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입국 후 2주간의 자가격리가 끝나자마자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한인마트를 찾았다. 솔직히 말하면 누구도 추천하지 않는 자리였다. 하지만 놀면 뭐 하냐는 마음으로 약속을 잡고 인터뷰에 응했다. 다행히 일손이 부족해서 당장 나오라는 말을 들었고 그렇게 1년간의 마트 생활을 해나갔다. 


몸을 쓰는 일을 정말 오랜만에 해봤다. 아침부터 밤까지 서있었고 앉아 있는 건 고작 식사시간이 유일했다. 새로운 경험은 그래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기에 버틸 만은 했다. 다만 육체적 피로보다 더 힘들었던 건 정신적 피로였다. 대다수 동료는 그곳의 생활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푸념하는 이유는 나도 같이 겪어봤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내가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 해도 확실히 환경에 둘러싸인 인간은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도 스스로 실망하는 시간이 점점 잦아졌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이러려고 캐나다까지 왔나?' 누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창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국에서 받았던 가장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내가 한심해졌다. 이대로 두면 패배의식과 매너리즘에 빠질 테고 이건 내가 원하는 게 분명 아니었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딱 지금 벗어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이직 자리를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남아 달라는 부탁을 뒤로하고 그렇게 나의 캐나다 첫 번째 직장 생활은 마무리됐다. 


전형적인 한국인답게 돈 나올 구멍이 없다는 것은 나에게 불안의 요소였다. 무직 기간이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다음 직장을 구했다. 정말 평생 일복은 많은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어떤 상황에 뚝 떨어진다 한들 굶어 죽진 않을 듯하다. 두 번째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최소한 첫 직장에서 느낀 결핍의 해결이었다. 나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트리지 않고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일.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한 번쯤 꼭 해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망설이지 말자. 어차피 이미 내 인생은 거꾸로 가는데 겁먹지 말자. 그래 그걸 해보자' 


나의 두 번째 캐나다 직장은 스타벅스다. 포지션은 바리스타. 여기에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스무 살 무렵 번화가의 가장 인기 있는 카페에 면접을 봤는데 외모가 부족하다고 탈락했다. 그 이후 카페 알바는 나에게 넘사벽의 무엇인가로 남았다. 다행히 캐나다 스타벅스는 그런 조건으로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생각했던 것처럼 모두 친절했다. 여전히 영어가 내 발목을 잡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부족한 언어능력을 채우기 위해 공부는 안 하고 온갖 매장의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고 손님들에게 누구보다 크게 인사한 덕분인지 동료들이 직접 선정하는 우수사원으로 뽑혔다. 이런 의미로 스타벅스는 나에게 매일이 도전이었다. 가장 부족한 면을 그대로 드러내며 자존감을 바닥에 치게 하지만 나를 좋아하는 많은 친구들이 있고 그 험난한 곳에서 좋은 평판을 받으며 살아남은 나를 자랑스럽게 느끼게 하는 영역. 힘들어도 그래서 좋았다. 출근하고 손님을 응대하고 음료를 만들고 동료와 캐미를 쌓아나가는 매일매일 수많은 퀘스트를 이겨내야 하지만 스타벅스는 여전히 즐겁고 나에게 많은 것을 주는 직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쉽게 망각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온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아픈 질문에 대한 답을 돌아보려 한다. “캐나다에서 너의 직업은 무엇이니?” 수업시간에 배운 인간의 욕구단계가 이런 것일까. 첫 직장은 나에게 이 나라에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는 가장 원초적인 부분에 대한 답을 줬다. 두 번째 직장은 언어의 벽은 여전하지만 친구들도 많아지고 나 스스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만족감을 줬다. 난생처음 외국에서 살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니 또 스멀스멀 마음속에 다른 욕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 이제 그러면 나는 앞으로 뭘 하고 싶을까?' 또 나는 나 스스로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리얼터’가 됐다. 한국으로 치면 공인중개사. 내 삶의 또 다른 페이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브런치 북을 쓰는 이유는 나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이유도 있지만 궁극적으론 내가 이 일을 택한 이유와 맞닿아 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아직 내 코가 석자에 앞가림도 못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 또한 전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이민 1세대의 불안한 삶의 연속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고싶은 새로운 직업을 못 가질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나만을 성공을 위해 일하고 절대 손해보지 않으며 효율과 실적, 결과만을 쫓아서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게 틀렸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땐 그게 맞았고 나에게 필요한 시절이었으니까. 치열함이 주는 아드레날린의 맛을 알지만 모두가 또 언제나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다른 패턴의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 누군가 이게 내가 가야할 길이 확실하냐고 묻는다면 난 여전히 답을 내지 못할 것이다. "글쎄 우선 이것도 어떻게 될지 해 봐야 알지 않을까?" 지금은 이게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울이나 토론토든 전 세계 어디에 있던 간 몸 누이고 쉴 수 있는 집은 누구에게나 모두 필요하다. 생활비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또 인생의 가장 큰 소비가 집과 연결되어 있다. 이 중요한 걸 다들 너무 쉽게 말한다. 특히나 한국 사람들은 모든 초점을 경제적 관념에만 맞추고 그렇지 않을 경우 잘못된 선택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최소한 이런 직업인은 되지 않으려 한다. 거창한 부동산 투자나 재테크와 관련된 내용은 내가 다룰 주제가 아닌 듯하다. 직업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와 소비자 입장에서 유용한 정보를 나누며 고민하고 망설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이 다음의 직업이 또 있을지 아직 알 순 없지만 지금은 여기에 집중해 볼 생각이다. 부디 이번 글은 프롤로그에서 끝나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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