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아버지의 애달픈 삶의 시작
1951년. 한민족의 비극인 전쟁 중에 태어난 나는 생의 첫 나이를 한 살이 아닌 네 살로 시작했다. 첫 시작부터 먹지도 않은 떡국을 세 그릇이나 더 먹었기에 이는 순탄치 않는 삶을 예견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떠올려본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전라도에 위치한 화순 탄광에 근무하셨는데, 힘든 그 시절 가족수당을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 갓난 아기인 나를 세 살을 보태서 출생 신고를 하셨다. 또래보다 작다는 의문을 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이었는데, 큰 누나로부터 듣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시기였다.
혹시나 출생을 몇 년이나 빠르게 할 수도 있을까 의문을 품고 계시는 분들에게 설명을 드리자면, 당시에는 영양분, 위생 관리, 약 등 모든 게 지금보단 인식도 물자도 부족했기에 돌 되기 전에 죽은 아기들이 더러 있었다. 그렇다 보니 뒤늦게 출생하는 게 관습이기도 했고, 지금과 같은 전산 시스템이 아닌 수기로 관리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면 그게 법이 되는 관습의 법칙이 통한 시절이었다.
나는 또래들보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도 한창이나 모자랐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별이 있었던 때는 아니었기에 심적 불편함은 없었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아이들이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대화만 되면 친구 먹을 수 있는 순진한 때였다. 더구나 부모님들의 간섭은 애당초 없기에 아이들의 순박함을 이어갈 수 있는 세월이기도 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그때는 이름 순이 아닌 키 번호로 순번이 정해졌는데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늘 1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떠올려 보면 공부는 곧잘 따라갔었는데 몸으로 하는 일만 불리했다. 억울한 일이라고 하면 달리기 같은 경우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는 거. 학창 시절에 특별한 불편한 기억이 없는걸 보면 아마도 전쟁 직후 살아남는 게 우선인 시대이기에 학교 운영도 가볍게 맞춰 있을 거란 생각이다. 농사일은 예나 지금이나 일손이 늘 부족한데 툭하면 수업보단 농사일이 더 많았을 시기였다.
인터넷의 발달로 오래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인터넷 동문회 사이트를 통해서 국민학교 동창들과의 재회였는데. 모두들 세월을 얼굴과 머리로 직통으로 맞았지만 오십 년이 흘렀어도 추억으로만 간직했던 녀석들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친구들이 나를 보면서 했던 첫 마디는 "너 키 엄청 컸구나!"였다. 16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지금의 나의 키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건 또래들보다 많이 작긴 했었나 보다.
그리고 내가 세 살이나 어리다는 걸 굳이 말하진 않았다.
나의 아버지는 이른 출생신고 때문에 겪을 고충을 짐작하셨는지 4남매 중 특히 나에게 미안해하셨다.
기질이 그랬던 것인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인지 나의 나이에 대해 어떤 불평도 비관도 하지 않았다. 살다 보면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게 마련인데, 평생 직업이 이발사이다 보니 퇴직이란 개념이 없는 직장인으로서는 손해 본 일이 없었으며 군대 역시 이르게 다녀왔기에 그만큼 철이 빨리 들기도 했다. 국민연금과 지하철 무임승차 역시 조금 빠르게 혜택을 보게 되었으니 오히려 아버지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 되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현재 나이 차이로 인한 불편함을 겪고 있다면 세월은 언젠가는 충분한 보상을 해준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건 경험의 법칙이다.
아버지의 청년 시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연장한다는 건 우리 집에서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동네 대부분 형편이 좋지 못했기에 친구들처럼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난 우연히 이발 기술을 배웠는데 그게 나의 평생 직업이 될 줄은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행운이 더해졌다.
건강한 대한민국 사나이는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한다. 이른 나이 덕에 조금 이른 19살에 군 입대를 했었는데 이때부터 직업의 운은 제대로 발휘되었다. 보통 국민학교 졸업자는 전방으로 배속되어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발 기술 덕분에 서울 수도경비사(청와대 소속)로 차출되면서 헌병대에서 3년 동안 이발병으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 병사가 아닌 간부급 이발이었기에 계급이 높은 사람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기에 나름은 편한 군 생활을 했었다고 볼 수 있다.
10대 중반 시절이었는데 이른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 늦게까지 몸으로 해야만 하는 이발 일이 매우 고되어서 그만두고 싶다고 형님에게 말했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호되게 혼이 났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형님에게 매우 감사한 일이다. 돌아가신 나의 형님은 미래를 예견하셨던 것일까.
70년대는 군사정권 시절이었기에 서울의 헌병대 보급 체계는 타 부대보다 월등히 훌륭했다. 고향에서는 명절에야 맛볼 수 있는 고기를 군대에선 종종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간혹 부식으로 제공되는 음식 역시 풍성했다. 나의 눈엔 모든 게 신기했고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여담이라면 당시 야간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기에 통행증을 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야간에 이동할 수 없었다. 누나와 매형이 잠시 서울에서 생활을 할 때가 있었는데 매형이 통금 이후에 다니다가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될 뻔했다. 없던 시절이어서 벌금도 문제였고 당장 이른 아침 일찍 일을 해야 하는 매형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처남이 수방사에 근무하는데 전화 한 통화만 연결해 달라는 부탁에 야간에 통화를 했었던 적이 있었다. 전화 한 통에 매형은 통행증을 받아서 무사히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아마도 경찰들은 헌병대 간부로 생각했을 것 같다.
전역 직전 수도경비 사령부 헌병대 하사관으로 권유받기도 했었는데 만약 군인으로 남는 선택을 했었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그땐 새로운 목표가 생겼을 시절이었다.
'이곳 서울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
광주 아래 화순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19년을 살다가 서울을 처음 마주했을 당시의 신비함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 수도경비 사령부는 지금의 남산한옥마을 자리에 위치했고 내 머리 위로 남산케이블카가 오르고 내리는 게 너무도 신기했었다. 그렇게 1970년의 낯선 서울의 삶을 시작으로 5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선택의 법칙이었다.
연예 그리고 결심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