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과에는 파트타임을 제외한 풀타임 학생이 대략 75명 정도 있었다. 내 생각보다는 많은 수였는데 처음 한 학기는 이 인원수 + 파트타임 학생이 함께 듣는 수업이 대부분이라 강의실이 학생들로 빽빽했다. 정말 오래된 영국의 건축물 내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환기도 잘 안되고 덥고 공부하는 시설 자체만을 따지고 보면 한국이 더 낫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낡으면서도 고풍스러운 강의실에 묻어있는 세월의 흔적 속에서 수업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르게 나를 들뜨게 했다. 가끔은 내가 영화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랄까. 75여 명 중에 학생들의 국적을 따져보자면 대략 30% 중국인, 20% 영국인, 20% 영국 외 유럽권, 10% 중남미, 그리고 한국, 일본, 싱가포르 등 중국 외 아시아가 10%. 나머지 10%가 그 외 중동, 아프리카 정도였다. 입학식 때 우리 과에 대략 20여 개국 좀 더 넘는 국적의 학생들이 있다고 했으니,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공부를 해 보는 경험 자체가 굉장히 신선하고 값진 것이라 생각했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 과에는 학생들의 나이 때가 정말 다양했는데 학부를 갓 졸업한 학생들부터 40 대 50대 60대까지 있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자 혹은 경력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행인지 나의 나이 때는 여기저기 낄 수 있는 중간 나이 때라(?) 제법 폭넓게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영국 석사의 학제는 가을학기/봄 학기/시험/논문으로 이루어진다. 학기 중의 수업은 교수/강사들의 수업+외부 강사 혹은 전문가의 세미나+그룹 활동 + Tutorial이었는데 수업은 몇 개 안 돼도 관련된 내용을 수업 전, 후에 찾아보고 그룹 활동까지 하려면 은근히 일주일이 빨리 간다. 또, 별도의 보충수업 격으로 박사과정 학생들이나 Ph.D들이 Tutorial을 진행하는데, 이때 본 수업에 필요한 background 수업이 이뤄지고 이와 관련하여 질의를 자유롭게 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런 시간이 자주 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질문하는 것에 겁먹다가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제법 적극적으로 했다. 학기 중간중간에 에세이 쓰는 과제가 있으니, 아카데믹한 글을 써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여간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구직활동까지 동시에 했으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을학기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봄 학기부터 논문 준비를 위해 워밍업을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논문 쓰는 방법을 익히고 Supervisor를 스스로 찾아서 1:1 미팅을 하며 주제를 좁혀나간다. 이 와중에 다행(?)인 것은 전 학기와 다르게 내가 과목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어서, 정말 흥미롭고 관심 가던 과목을 골라 즐겁게 수강했다. 에세이도 여러 개를 쓰다 보니 어느 정도 감을 잡았는데, 가을학기 때와 비교하여 점점 올라가는 에세이 성적을 보니 나름 성취감을 느꼈었다.
문제는 시험이었다. 가을, 봄, 두 학기 동안 배운 내용을 한꺼번에 5월에 시험을 보는데, 가을학기에 배운 내용은 대부분 까먹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데 예전처럼 잘 외워지지도 않는다. 이스터 연휴가 있지만 시험공부하는데 시간을 쏟았다. 연휴가 있어도 시험이 잡혀있는 학생들이 공부에 매진하는 것은 한국이나 이곳이나 피차일반이다. (왜 항상 시험기간 전엔 긴 연휴가 있고 날씨가 좋아 보일까...) 성적은 한 달 뒤에 나오는데, 50점 미만은 Fail이라 한 달 뒤 재시험을 쳐야 한다니, 이를 피하기 위해 정리해서 외우고 또 외우기를 반복했다. 재밌는 점 하나는 한국에서 공부 (시험공부를 포함한 각종 공부)라는 말을 그냥 study라고 해서 썼는데, 여기서 시험공부는 review라는 말로 따로 쓴다. 복습이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맞으려나. study는 어떤 주제를 탐구하고 연구할 때 쓰는 단어이다. 오히려 Research의 의미와 유사하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10년 동안 내가 치러 왔던 중간고사, 기말고사, 토익, 오픽, 아이엘츠 등은 review에 가깝다.
논문 주제를 봄 학기 때 두어 번 Supervisor와 미팅을 해서 잡았기 때문에, 주제를 보다 명확히 하고 리서치의 방법(methodology)을 찾기 위해 시간을 많이 들였다. 1:1 캐주얼한 미팅이었기 때문에, 내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았고, Supervisor의 피드백도 꼼꼼했다. 나의 논리를 교수님이 조목조목 비판하기 때문에 이를 방어할 때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재미있었고 유익했고 나의 사고를 좀 유연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학부가 공대였기 때문에 이런 식의 접근이 개인적으론 신선했다. 물론 이건 Supervisor의 성향에 따라 다르기도 한 것 같긴 하다. 남편의 경우 담당 Superviosr가 워낙 바빴는데, 미팅 시간 잡기도 힘들고 피드백도 심플했다. 공대라 그런지 조목조목 비판-방어를 하기보단, 논리와 방법이 중요해 보였다.
다른 데서 2년 동안 하는 과정을 어떻게 1년 동안 할까 호기심 반 걱정 반이었는데, 압축해서 하다 보니 공부량이 상당하고 주말을 빼고는 여유시간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물론 어딜 가나 예외가 있듯이 중간에 장기로 유럽여행을 가는 친구들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보통 학과 도서관에는 과친구들이 항상 상주해있었다. 어쨌든, 1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생각보다 금방 갔다. 논문의 경우도 준비하는 시간이 타 국가에 비해서 짧다 보니 타이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돌이켜 보면 오히려 더 집중력 있게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