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셀라 Jul 18. 2023

2019년 5월의 앙헬레스-1

알고 싶지 않았던 도시의 이름


앙헬레스는 필리핀에 있는 도시다. 필리핀 하면 보통 세부나 마닐라를 떠올리는데 앙헬레스는 생소한 도시였다. 그곳에 인접한 클락은 원래 미군 공군기지였고 현재는 골프의 성지다. 그래서 사업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린다고 한다.


앙헬레스와 클락은 한인타운이 잘 되어있고 유흥의 도시로 유명하다. 앙헬레스나 클락을 검색하면 네이버 이미지에는 헐벗은 여자의 사진과 클럽 같은 곳의 사진이 가득하다.

나는 분명 도시 이름을 검색했다.

나는 앙헬레스와 클락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한번 다녀온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저 사기꾼들과 도망자들의 도시라는 정도. 디즈니 플러스에서 카지노라는 드라마를 광고할 때마다 기분이 언짢은 건 그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아빠에 대한 기억 때문일 거다.


필리핀의 후덥지근한 공기는 공항도 피해가지 못한다.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밤 새벽. 생전 처음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걸 힘들어하는 아들을 위해 아침엔 한국에 도착하려고 그 더운 클락 공항에서 첫 비행기를 기다렸다. 필리핀 경찰과 씨름하느라 아빠의 시신을 받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국 하루를 더 묵어야 했기 때문에 머릿속엔 온통 아들 생각뿐이었다.


낯선 필리핀에서 거의 10여 년간 만난 적 없던 아빠의 이야기들, 나를 낳아준 사람의 죽음 같은 감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와 동생, 남편은 땀에 절어 있었고, 피로했다.


검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188cm의 중년 남자. 아니, 할아버지. 내 아이의 할아버지. 한번도 내 아들을 안아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아이의 할아버지였던 그 남자가 하얀 가루가 되어 담겨있었다. 동생이 무섭다고 해서 함께 갔던 남편이 대신 가방에 짊어졌다. 둘째는 아빠의 시신을 보고 잠자는 게 무서워서 성인 딱지 떼고 처음으로 남매끼리 한 침대에서 잠도 잤다. 그렇게 원수 같았던 놈과 또 미운 정을 하나 더 쌓았다.


이른 봄비가 한창이었던 2019년 5월. 카페를 운영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약 2주간의 인테리어 재공사를 하고 오픈했던 시기. 그때의 난 악착같은 오기로 되지도 않을 상황을 끌고 나가 카페를 창업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남편과 거의 매일 싸웠다. 지금도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정도다. 악착같이 성공시키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아는 사람에게 인테리어를 맡기는 바람에 카페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인테리어가 정말 폭망했다. 결국 뜯어고치고 새로 만들었다. 그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겨우 카페를 재오픈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이상한 연락을 받았다. 필리핀 영사관이었다. 아버지 되시는 분이 돌아가셨으니 시신을 찾아가라는 안내였다. 처음에는 신종 보이스피싱인가싶었다. 그래도 영 찜찜했다. 연달아 새엄마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혼자 있을 때 차마 받을 수가 없어서 원수 같지만 그나마 사정을 공유할 수 있는 둘째에게 연락했다.


둘째와 나는 가게를 서둘러 마감하고 새로 생긴 선술집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대처방법도 세워놓았다. 사기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기도 했다. 허나 인터넷에는 이런 경우에 대한 안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필리핀 영사관 번호를 검색해 직접 전화해봤다. 아빠의 성함과 나의 개인정보를 알려주었고, 그 문자가 진짜 국가에서 보낸 안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새엄마와 통화한 지는 꽤 됐는지 나에게 대체 언제 오실 거냐고 물었다. 약간 짜증스러운 그의 대답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영화에서나 소설에서 보던 아빠의 죽음과는 너무 달라서 현실 같지가 않았다.


새엄마. 잘 대해주려 노력했겠지만 애초에 다혈질인 성격이 나와 맞지 않아서 안 좋은 기억뿐이던 사람.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늘 나에게 큰소리를 치던 그 사람. 정말 통화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눈 딱 감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너머로 처음으로 울며 나에게 애원하던 그 목소리에 현실감이 몰려왔다. 드라마에서도 본 적 없는 일이 나에게 벌어졌다.


새엄마와 아빠는 경제상의 이유로 이혼이 되어있어서 남이기 때문에 시신을 가지러 올 수 없었고 새엄마와 아빠 사이의 딸은 미성년자라 혼자 시신을 가지고 올 수 없었다.


나도 가정이 있고 일상이 있어 시간을 내 필리핀에 다녀와야 하는 것은 큰일이었다. 필리핀으로 갈 비행기 티켓값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왜? 어렸을 적엔 10년 넘게 양육비 한번 준 적 없으며 다 커서는 대학 졸업시켜줬으니 남보다 못하게 지냈던 그 사람. 결혼할 땐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어렵게 찾아 남편과 면회하러 갔었는데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난 나를 키워주신 새아빠의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했다. 남보다 못하지만 남이 아니고 혈육이지만 제발 몸에 같은 피는 흐르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 거기서 썩든 말든 못된 마음을 먹고 단호하게 거절한 채 전화를 끊었다. 토요일 밤이었다.


하필 토요일 밤이었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고 우리는 평소와 같이 교회에 갔다. 예배당에 앉았을 때야 난 나를 낳아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흐느끼기까지 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 것인지 그때에야 결단이 섰다. 좋든 싫든 아빠의 마지막을 수습하는 게 평생 후회하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르겠다고.


큰 아빠의 유산을 가로채고 평생 가꾼 회사를 무너뜨린 채 필리핀으로 도주했었던 그 사람. 큰 아빠의 유산이 혹시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한낱 희망을 걸었던 큰엄마와 30년 만에 제대로 통화했다. 덕분에 나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필리핀에 갈 수 있었다. 여권이 없었지만 나라에서 긴급여권을 발행해 주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이가 걱정되었지만 물갈이가 심하다는 필리핀. 게다가 시신을 수습하는 일까지 해야 하니 아이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평생에 미운 놈이라고 아빠에게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었던 엄마가 아이를 맡아주었다. 바보같이 착한 건 엄마를 닮은 건지, 그래도 불쌍한 사람 잘 수습하고 오라고 다독여준 엄마 덕에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시어머니도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셨다. 함께 운영하던 가게에 남편이 없으면 어머니 수발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정말 큰 일인데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양보해주셨다. 복잡한 가정사를 가진 며느리. 안 그래도 곱지 않은데 사기꾼 가득한 도시에서 비명횡사한 아버지를 둔 며느리까지 되었다. 아, 마지막까지 도움 안 되는 이여.

이전 03화 담배를 버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