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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라 Jul 17. 2023

나는 나를 알고 싶다.

가장 강렬하게 살아갈 때에 일어나는 기적

  

식물의 뿌리만 보고 식물의 종을 알아채는 사람은 학자뿐일 것이다. 애초에 뿌리는 잘 안 보인다. 우리는 줄기와 돋아난 잎의 모양, 꽃과 열매 등을 보고 식물을 안다. 씨가 좋은 곳에 정성스럽게 뿌려졌든, 길가 아스팔트에 떨어졌든 살아남아 자신의 생을 다할 꽃과 들풀은 다 살아남는다. 원해서 뿌려지는 씨앗은 없다. 원해서 태어난 아이는 없는 것처럼. 


식물의 종자가 어떻든 살아남기 위해선 땅에 부지런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 급하면 돌덩이에 묻어있는 작은 흙덩이에라도 의지해 터를 꾸리는 것이 들풀이다. 식물이 움직일 수 없다고 다들 간과하지만 어쩌면 식물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생명력을 가졌다. 길가를 걷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생명력의 전투적인 싱그러움 때문이다. 아주 작은 꽃도 피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경을 겪어왔을지.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척박한 사막에 떨어졌다고 표현하기엔 힘들겠지만 나름의 역경을 겪은 들풀로써 나는 나를 알고 싶다. 


품종을 알고 화분에 곱게 관리받으며 자란 아이는 아닌지라, 그저 뿌려진 대로 살아진 대로 살았던지라. 내가 계절을 맞을 때마다 잎의 모양은 어떨지, 어떤 꽃을 피울지 열매를 피울지 많이 궁금해하며 살았다. 


혹한의 겨울엔 도대체 살아남을 순 있는지 내게 꽃이 피는 날이라는 게 오기는 하는지 수많은 사람의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확신할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누군가 무책임한 입바람을 불어 쫓겨난 민들레 씨처럼 부유하던 나날. 아무렇게나 뿌려진 씨앗. 하필이면 돌가에, 차도에 보도블록에 떨어진 것 같았던 나. 


멋들어진 비유로 설명하고 싶지만, 현실은 단순하다. 나는 나의 울타리인 가족과 환경을 원망했다. 만족하지 못했고 늘 결핍에 시달렸다. 30살 중반에 접어든 지금, 나는 어떤가? 여전히 가족을 원망하지만 그들을 수용하고 그 안의 어린 나를 달랠 수도 있게 되었다. 결핍은 뿌리를 내리기 위한 발악으로 결국 척박한 돌밭을 뚫고 자리 잡게 했다. 성장하게 했다. 


나는 거울을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외모에 별로 관심이 없을뿐더러 본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한 번쯤은 찬찬히 들여다보며 눈썹을 다듬기도 하고 얼굴 모양새에 맞게 화장을 하고 옷도 차려입는다.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무엇일까? 움직일 수도 없는 식물은 자기 모습을 알지도 못 할 텐데 잘만 산다. 하지만 자라기 위해,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해 겪는 아픔들은, 작은 의지들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심지어 이런 촬영이 있는 날도 민망해서 잘 들여다보지 않는 편

비록 내면을 완벽하게 비추는 거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나는 안다. 이쯤 살다 보니 알아지게 되었다. 누군가 아무리 일러줘도 알 수 없었던 것이 살다 보니 그저 알아지게 되었다. 


어느 날은 환하게 빛이 비치어 전체가 보이는 날도 있지만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보아야 하는 날도 있다. 내면은 이름과 나이로 혹은 직업이나 재능, 외모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것을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어느 날은 나를 보기 위해 나에 대해 나열해본다. 내 이름, 나이, 가족, 현재 상황, 기분, 감정, 재산, 자격증, 주변 사람 등등….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잔뜩 적어본다. 목표도 정하고 계획도 세워본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정말 나일까?’ 하는 불안에 휩싸인다. 이것이 자기계발의 가장 큰 허점 아닐까. 사실 이런 것들은 생에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삶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또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모습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 살아낼 의지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이 가장 환하게 보일 때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충만할 때다. 살아왔던 환경도, 주변 사람들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도 그것을 보게 하는덴 하등 쓸모가 없다. 


나는 나를 알고 싶다.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얼마나 더 많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끝까지 가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처음으로 나를 환하게 보았던 것 같다. 그때야 비로소 나를 알게 되었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할 수 있었고 또 해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며 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생을 살아냈다. 어쩌면 제대로 이름표가 붙지 않았던 들풀의 인생이었기에 겪을 수 있었던 멋진 계절이었다. 


바닥에 구르며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 하는 것 같은 젊음의 시절에도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스쳐 가는 흙먼지도 내게 양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20대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30대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조기교육에 익숙한 우리나라는 이런 책들에 열광한다. 나도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바다. 그러나 살아내고 나니 그런 생각도 든다. 보이지 않을 땐,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내면 된다. 남들 하는 만큼 멋지게 살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그저 주어진 대로 나답게 살아내는 것 말곤 답이 없지 않겠는가. 


의지할 만한 어른이 없었던 내가 멋대로 내린 결론이라 동의하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누군가에겐 좋은 어른이 있었고, 좋은 가정이 있었을 테니. 혹시 그런 것이 없다 해도 기죽을 필욘 없다. 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살아낸다고 해서 나처럼 되진 않는다. 그저 살아내다 보면 당신처럼 될 것이다. 


조금의 결론을 얻은 삶의 중반.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나를 알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 준비를 한다. 


선명한 나를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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