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아재인 우리가 젊음에 끌리는 것에 대한 단상>
'우리는 젊음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회 초년병 시절 회식 때마다 집에 안 가려고 버티는 부장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집안에 우환이 있나?'
저들은 왜 이렇게 질척대는 것인가. 그리고 너무 재미없는 구식 개그가 난무하며 시체처럼 테이블에 쌓일 때면 너무 지겹고 힘들었다.
그냥 같이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곧통이랄까.
우리는 무얼 바라 이 자리에 앉아 억지웃음을 자아내는 것인가.
이곳이 법정이라도 되는 양 상대방 변호사가 발언권을 채갈까 봐 쉴 새 없이 떠드는 그들의 구강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어디 직장뿐이랴.
친지를 만나거나 동문회를 가도 나이 든 웃어른들은 무엇이 그리도 미련이 남는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듯 말꼬리를 이어가고 1차를 거처, 2차를 지나, 3차를 가고, 기어이 노래방이 있는 4차까지 가야 전쟁 포로 같은 우리를 풀어주곤 했다.
당연히 싫었다.
내 나름 잘살고 있는데 '저축을 해야 한다', '책 많이 봐라', '졸꾸 공부해라', '애는 얼른 낳아라' 등등 아재들이 온갖 참견과 오지랖을 부려대면 동공이 풀리면서 그야말로 무아의 상태, 의식의 저편으로 아스라이 정신이 잠기어 갔다.
그리고 가장 싫은 것은 그놈의 술잔 돌리기.
아. 3차 감자탕 집에서 들깨와 육수가 즌뜩 묻은 잔을 손으로 쓱쓱 닦아서 건네줄 때면 헛구역질이 나오기도 했다.
그 시절엔 항상 생각했다.
왜 이럴까?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저분의 사회생활 센스나 스킬이면 본인도 앉아 있기 싫은 후배들 멱살 잡고 혼자 이 술자리를 하드 캐리 중이라는 것을 잘 알 텐데.
어느덧 사회생활한 지 10년이 넘어가고 슬슬 중년의 문턱에 앉아 아재라는 이름표가 손에 닿을듯한 나이가 되자 잘은 모르지만 조금씩 그들의 행동 양식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준아재인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리의 아재들이 젊은 친구들과의 자리에 집착하는 것은 그리움일 것이다.
어린 친구들의 반짝반짝한 눈과 보들보들하고 윤기 있는 볼만 봐도 초여름 신록을 바라보듯 기분이 좋고, 자기 어린 시절이 막 떠오르는 것이다.
젊음이 주는 생기는 아무리 성형을 하고, 백옥 주사를 꽂아 대봐야 다다를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곳에 있다.
마치 여름날 매미가 쨍쨍 우는 숲 속에서 만나는 푸르른 빛깔이 도는 고사리대 같이 싱그럽다고 해얄까.
아니면 볕 좋은 날 마당에 있는 장대로 바친 빨랫줄에서 잘 말려 엄마가 툇마루에 앉아 빳빳이 다려 놓은 누나의 하얀 블라우스 교복의 감촉 같은 그런 것.
음... 또 늦여름에서 초가을 넘어갈 때 내 허리춤만큼 자란 벼의 머리꼭지를 손으로 쓱쓱 쓸며 논두렁을 지나는 그런 느낌.
한마디로 생기가 발랄한 느낌이다.
이런 기운은 우울감이 옆으로 잘 옮겨 붙는 것마냥 잘 옮겨 붙는데 아재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 기운을 받는 게 너무 좋은 거다.
그래서 말이 많아지고, 조금이라도 그들과 공감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나는 어디까지 왔나 대보고 싶은 마음이 큰 거 같다.
나보다 연배가 어린 후배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어딘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 지점들을 느끼는 것은 니트 옷에 보풀이 올라온 것을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까실까실한데 이게 많다고 느끼면 약간 서글퍼지기도 하고 그런 것 같다.
물론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별로 느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점들이 하나둘 느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자꾸 말이 많아지고, 여기저기 나와 그들을 견줘도 보고, 옆에 세워보기도 하려고 미련을 못 버리는가 보다.
어제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그리고 해외연수를 마친 친구들을 보는데 보기만 해도 파릇파릇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자꾸 한두 마디라도 더 말을 섞고 싶고, 괜히 묻지도 않은 조언을 해주고 싶고, 그냥 그대로도 예쁘다고 말해주고 싶고 그랬다.
이제 개저씨의 길로 접어든 거겠지.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잘 지켜야겠다.
앞으로는 입은 좀 닫고, 지갑은 활짝 열자.
세상의 모든 아재들아. 우리 존재 화이팅.
#개저씨